인생은 타이밍

by 궐리버

찌는 듯한 더위의 8월 말 언젠가, 피 터지는 티켓팅으로 정평이 난 시설공단의 수영 강습을 운 좋게 신청에 성공하게 되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무미건조한 삶에 촉촉한 생기를 얻기 위해 수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장과도 집과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다른 수영장은 새벽부터 신청 페이지가 오픈했기 때문에 맨날 피곤에 절여진 나에겐 애매한 이곳밖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내 속살을 남에게 들추기엔 자신도 없었지만, 다들 헐벗고 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그나마 뻔뻔하게 다닐 수 있었다. 시작이 이렇다 보니 옷 입고 보는 게 오히려 더 어색할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초급반 강습을 듣기 위해 초급반 레인에 들어가 부끄러운 나머지 목까지 물에 잠겨 괜히 팔만 휘젓고 걸어 다녔다. 대부분은 무채색의 수영복을 착용하고 왔다. 흰색 수모, 혹은 검은색 수모, 수영복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다. 나 또한 무난함이 제일 최고라는 생각에 5년 전에 산 검은 수영복을 억지로 껴넣고 왔다.


그러던 중 누구보다 유채색 수영복을 입고 있던 그녀를 보게 되었다. 시커먼 군중 사이에 화사한 연보랏빛 수영복은 누구 눈에라도 띄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컬러풀한 수영복은 고수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는데, 초급반에 컬러풀이라니, 그녀는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나름 열심히 수영 수업에 참석하며 하나 둘 얼굴이 익숙하지만 아직은 서먹한 와중에, 그날은 또 주황색 수영복을 입은 그녀가 내 다음 차례에 있게 되었다. 내가 배영 할 차례에 그녀는 내 앞에 서서 누군가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제스처를 취했는데, 나에게 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우리는 서로 인사도 말도 한 적 없었기에 당연히 나는 그 제스처를 스쳐 지났다. 그러다 다시 대기할 차례가 되자 나에게 나이를 물었다. 어쩌다 보니 바로 옆에 나란히 있게 되어 아이스 브레이킹의 느낌으로 서로의 나이를 주고받았다. 나보다 두 살이 많다던 그녀와 처음 나눈 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나름 열심히 수영 수업에 참석하며 그녀와 잦은 대화가 이루어졌고, 내성적인 나는 그녀의 질문공세에 대답만 할 뿐, 내가 들은 질문을 그대로 질문하려 할 때면 다시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야 할 타이밍이 되어 자연스레 끊어지게 되었다. 꽤나 적극적인 그녀의 말은 휘젓고 물장구칠 때 일렁이는 수면 위의 파동처럼 내게 꽂히는 듯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게도 질문을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뭐 하고 놀아요?"

"사무직이에요?"

"퇴근하면 보통 뭐 해요?"

"여름휴가는 여자친구랑 다녀왔어요?"

"다른 운동은 안 해요?"

"키가 몇이에요?"

"가족들도 다 키가 커요?"

...

...


이제는 그녀의 매주 스케줄까지 알 정도로 많은 공유를 받았고, 본인 약속에 놀러 오라며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준다며 쿨한 모습도 보였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며 참 붙임성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하필 남자는 몇 없는 반에 친해진 사람이 그 화려한 사람과 나였다. 하지만 그 많은 질문 속에도 정작 누구인지는 서로 알지 못했다. 이름이며 성이며, 물론 물속에서 전화번호나 메신저 아이디를 묻기도 애매하지만, 나는 궁금증이 커져만 갔지만서도 내 성향이 그렇듯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해 수업 끝나고 샤워를 다 하고 나올 동안 기다릴 생각도 못하고 그냥 급하게 집에 갈 뿐이었다.


그렇게 수업을 들은 지 한 달이 다 돼갈 때쯤, 10월의 수영장 수업이 잠깐 중단된다는 공지를 듣게 되었다. 한 달간 전체 공사가 이루어져 수업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녀는 10월 동안 어떻게 할 거냐며 묻는데, 본인은 월수금에 필라테스를 할 거고, 화목은 호수에서 러닝을 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수에 와서 같이 뛰자는 말을 건넸다.


"아 화목~ 그럼 시간 한 번 보고.. 뭐 없으면..."


10월은 열심히 자유수영을 다른 수영장에 다니며 나름 혼자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귀찮을 땐 안 가기도 하고 불규칙적이지만 꾸준히 수영을 지속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뛴다는 호수에 한 번 가볼까 싶다가, 가서 뭐 하나 싶어 주저하며 날을 보냈다가, 진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언젠가 목요일에 그 호수에 찾아가게 되었다.


다들 간절기에 재킷이나 바람막이를 걸치고 달리고 걷고 하는데, 나는 반팔을 입고 유유자적 걷고 있었다. 모두 반시계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지나치지 않을까 괜히 곁눈질하며 한발 두발 내딛다 보니 어느새 한 바퀴를 채우게 되었고, 나는 괜한 일인가 싶어 그 호수를 빠져나왔다. 나를 봤을까? 나를 지나쳤을까? 오늘은 오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미 왔다 갔을까? 수많은 물음표만 머리에 띄운 채 주차된 차로 향했다. 나는 왜 그 호수에 찾아갔을까.


그렇게 11월이 되었고, 컨디션 난조로 3일을 빠지게 되었다. 그러고 목요일에 수업을 듣게 되었다. 선생님도 바뀌었고, 그때의 사람들도 대부분 바뀌었고,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기존 멤버 중 한 분이 나에게 물었다. "저번에 같이 오던 여자분은 왜 안 오셨어요?"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녀의 거취 역시 나도 몰랐다. 다음날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 새로운 사람들 속에 다시 섞이며 무채색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11월의 첫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데 뭔가 희한하게 계속 신호등이 주황불에서 걸렸다. 참 타이밍 더럽게 안 맞네. 그냥 달릴 수도 없고, 그냥 초록불이 다시 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그러다 그녀가 산다던 동네를 수영이 끝나고 지나가게 되었다. 잠깐 들어가면 그녀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무심코 그 동네로 차를 돌렸다. 그 넓은 곳에서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보다는 쉽겠지만, 김 씨인지 이 씨 인지도 모르는 그녀를 다시 조우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그냥 시간만 허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마주할 타이밍은 언제 다시 초록불로 바뀔지 모르는 일이 되었다.


그 동네를 돌아다니다 작년에 참 좋아했던 풀빵 트럭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항상 청각장애인 분이 파셔서 그때마다 내가 짧은 수어 실력으로 인사를 하며 몇 번 팔아드리곤 했다. 그 기억을 가다듬어 풀빵과 기름 없는 호떡을 하나씩 주문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수어에 놀라셨을 텐데, 나의 그 어쭙잖은 노력에 감사함을 느끼셨는지 손가락 하트를 주셨다. 연말의 따스함을 느끼기 위한 나의 나름의 노력이었다. 결국 그녀는 못 만났지만, 내가 좋아했던 겨울 간식을 만난 걸로 자기 위로를 한다.


그래도 타이밍 참 좋다. 그녀 덕분에 내가 좋아했던 호떡과 풀빵을 만났으니. 만약 그때 9월의 내가 수영이 끝난 뒤 그녀가 다 씻고 나올 동안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면, 10월의 내가 목요일 저녁 호숫가에서 러닝 하던 그녀를 만났더라면, 11월의 나는 그녀와 함께 그녀의 동네에서 내가 좋아하는 풀빵을 나눠 먹고 있었을까. 12월의 나는 다시 그녀를 마주치려 눈에 띄기 위해 반팔을 입고 화요일 저녁 호숫가를 거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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