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삶은 한가운데에 반드시 사람이 있다

by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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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무시로 사용하며 지적인척 한다. 서로 사맛디 아니한데 대화가 통할리 없다.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모르는지 모른다. 나는 이런 걸 ‘meta모름’이라고 칭하고 싶다.


존재하려면 생각해야 하고 생각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막상 제대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이 대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현재의 나 자신뿐이다. 자신의 앎이 어디에 기반하는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게 구조주의 철학자의 주장이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 의식, 지식, 지혜 같은 것들에는 모두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주적인 관점으로 봤을 땐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이고 또한 편협하다고 한다. 최근에 즐겨 봤던 “알쓸인잡”의 두 과학자는 항상 물음에 앞서 그 물음을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그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다.


“뭘 갚아요?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에요.”

“행복하게 살아. 그게 갚는 거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둘째 형이 울면 정말 큰 일이라고 말하는 막내의 대사가 생각난다. 둘째 이선균의 눈물은 본인은 아직 치유가 필요하단 거겠지. 참았던 어른의 짐을 내려버린 거겠지. 아무리 강해 보여도 사람은 모두가 약하다. 강해서 잘하는 게 아니라 약해도 해야 하니까 티 안 내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강하다는 말은 약한 것을 잘 감추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마음속의 과도기를 굳이 바깥으로 표출할 필요는 없다.


그리보면 하루 종일 무표정할 수 있는 건 축복일 수도 있겠다. 작 중 박동훈은 내내 무표정이다. 웃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일이다. 우리는 그걸 감정 노동이라고 한다. 이제는 무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도 능력처럼 보인다. 가진 자의 무표정은 고뇌지만 못 가진 자의 무표정은 불만처럼 느껴지는 게 자본주의다.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행색이 비루하여 상대방을 깔보거나 아래로 보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 상대에게도 그 살아온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지혜가 있고 그 지혜에 놀라게 될 수도 있다.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경청하고 배우려는 태도 그것이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태도이며 그 태도에서 통찰이 나온다.


나쁜 책에서도 배울 게 있다. 세상에 배울 게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배울 게 없는 것조차도 배움이니까. 모든 걸 배운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참 쉽다. 그래서 배움엔 끝이 없나 보다. 그래서 평생 배우다 죽을까? 그래선 곤란하다. 배웠으면 즉각 써먹어 보자. 배운 걸 써먹으면 내 것이 된다.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


사람은 적당히 불균형하고 불평등해야 살아가고 만족을 얻는다. 이지안은 가난이 무뎌져 쉽게 범죄까지 저지른다. 공평? 공평하면 행복할까?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행복하지 않은 게 뭔지 알기 때문이다. 행복은 불행 위에 피어난다. 기계적인 공평함이 얼마나 무서운지 궁금하다면 소설 <1984>와 <멋진 신세계>를 추천한다.


삼위일체 = 불안정의 안정, 인간 시대는 불안하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다. 완벽한 곳엔 인간이 설 자리가 없고 만일 있다고 해도 그곳에선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항상 내가 우선이다.


“성실한 무기징역수 같은 인생”


우리의 삶은 당신의 삶은 어떤가? 만족스러운 삶이 매일 반복되는 삶이 만족스러울까? 걱정 없는 매일이 이어지면 걱정이 사라질까? 다행히도 만족은 불만족에서 태어나고 걱정이 없는 것도 걱정이 된다. 그래서 삶이 참 재미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 참 재미있게 느껴진다. 불행 그리고 가난조차도 재미로 받아들여보면 어떨까? 마치 부자인 것처럼.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다. 누가 알면 어떡하지? 적어도 난 모른 척해줄게.”


자본을 혐오하되 혐오하는 자본의 노예가 되지 말자. 그러니까 자본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에 매몰되지 말자. 이지안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평범하고 무난한 삶으로 돌아온다.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미소 지을 줄 아는 소녀가 되었다. 드라마는 그렇게 끝이 난다. 해피… 엔딩인가?


평범하다는 것은 행복도 불행도 만족도 불만도 아니다. 이런 번뇌의 감정을 오롯이 끌어안으면서도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스스로를 위에서 바라보고 하루를 평가 내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 단지 그뿐이다.


가난에게 배울 수 있는 건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는 사실이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난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지안이 가난을 극복하고 평범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가난이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겨낼 수 있게 응원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응원을 선택한 덕분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주변에 당신을 위로해 줄 이가 없다면 당신은 가난하다. 그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집 밖으로 나가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삶의 한가운데 그곳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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