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오전 6시에 알람 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지난밤 새벽 1시에 잠들었으니 겨우 5시간을 잔 것이지만, 4시간 수면에 익숙해져서인지 비교적 수월하게 기상한다. 새벽은 하루 중 유일한 자유시간이다. 여느 때처럼 옷을 갈아입고 헬스장에 간다. 육신이 과하게 힘든 날에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다. 텅 빈 아파트 헬스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운동을 하다 보면 1시간이 금방 간다.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며 간밤에 온 메일을 확인한다. 출근은 아직이지만, 지금부터 회사 모드다.
출근하기 전에 메일을 확인하고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두어야 출근하자마자 일에 몰입할 수 있다. 보통 연말~연초에는 기업들이 자체 결산하느라 컨설팅 회사에 자문 요청을 하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1월은 좀 여유롭게 지나가나 했는데, 1월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새로운 프로젝트에 배정됐다. 그래… 놀면 뭐하니, 돈이라도 벌어야지.
프로젝트에 몇 달이고 투입이 되지 않아도 월급은 똑같이 나온다. ‘오히려 좋은거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일에서 얻는 성취감을 동력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프로젝트에 투입이 안 된 채로 일하지 않고 같은 돈을 받으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한다. 단순히 일을 못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프로젝트 투입 멤버를 결정하는 임원 혹은 상사가 자신을 왜 선택하지 않은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뭐가 못나서…? 왜 스태핑이 안 되지…? 내 능력이 모자란가…?’
거기다 월급만 똑같이 받을 뿐 한 명의 컨설턴트가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했는지는 평가에 바로 반영된다. 그리고 그 평가는 성과급과 연결된다.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전 8시에는 집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다. 컨설턴트의 사소한 장점 중 하나,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회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출근 택시비를 지원해주고, 퇴근할 때는 당연히 대중교통이 끊겼으므로 퇴근 택시비를 지원해준다. 단, 여기에 적응하면 주말에도 내 돈으로도 택시를 타느라 ‘텅장’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5년 동안 대중교통을 거의 안 타버릇해서 출퇴근길 지옥철에 탑승하면 공황장애 비슷한 증상이 발현된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는 증상.
오전 9시쯤 회사에 도착한다. 정시 출근은 9시 30분이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정시 출근 빈도가 현저하게 낮아진다. 그래도 1~2시간씩 늦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이해한다. 수면 부족이 지속되면 아침에 알람을 듣는 게 기적이라는 것을 너도나도 알기 때문이다. 나도 습관성 지각자 중 한 명이지만, 오늘은 10시에 있는 고객사와의 유선 미팅을 준비하기 위해 조금 일찍 출근한다. 평소보다 이른 출근은 나와 PM에게만 해당된다. (컨설팅 용어 1. PM : Project Manager의 약자로, 팀장을 일컫으며 하나의 프로젝트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곳에서는 돈을 더 받는 만큼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원칙이다.
지난 프로젝트에서는 PM이었는데, 이번 프로젝트는 규모도 크고 사내 가용 인원이 여의치 않아서 팀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개이득이다. 아무래도 PM으로 일하는 것은 내 똥을 치워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업무량과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PM을 맡게 되면 프로젝트의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므로 눈 떠서 잠들기 전까지 계속 일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가 않을 때가 많다. 방향성을 잘못 잡았다가는 고객사한테 욕먹고, 팀원들을 개고생 시킨 죄로 또 욕먹어야 한다. PM으로 일 할 때, 제대로 된 답이 안 나와서 프로젝트 기간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악몽을 꾼 적도 있고, 잠꼬대를 하면서 깬 적도 있다.
‘어어, 그거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이번 프로젝트에는 모델러가 필요했는데, 회사에 스태핑 가능한 모델러가 나뿐이었다. (컨설팅 용어 2. 모델러 :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 데이터를 추정하고 인사이트를 뽑는 인력) 모델러의 영역은 일의 대부분이 그렇듯 가르치는 것보다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야 하는 영역에 가까워서, 모델링을 한 번 해본 사람이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그다음 프로젝트에서도 모델러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운 나쁘게도 1년 차에 ‘모델링 한 번 해본 사람'이 되어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델링을 담당했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운이 나쁜 거다. 모델러는 절대 일찍 잠들 수 없는 숙명을 가졌으며, 혼자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나 자신과 혹은 엑셀과 싸우다 보면 어김없이 아침 해가 뜨고는 했다.
30분 정도 진행할 줄 알았던 고객과의 미팅이 오전 11시 30분에 끝났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바쁘면 식사를 거르기도 하지만 오늘은 미팅 때문에 팀원 모두 진이 빠져서 고칼로리 음식을 먹기로 한다. 중식당에서 5명이 메뉴 8개를 시킨다. 점심식사 중 대화 주제는 당연히 고객사와의 미팅 내용이다. 밥 먹는 시간 동안은 일 이야기를 지양하려고 하지만 오늘 같이 바쁜 날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어차피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러면 또 작업할 시간을 뺏기기 때문이다.
12시 30분에 커피를 한 잔씩 사들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한다. 대학생 때도 커피를 하루 1잔씩 마시긴 했지만 컨설턴트 생활을 시작한 이후 커피 섭취량이 과하게 늘었다. 심지어 작년에는 아침 출근 커피 한 잔, 점심 식사 후 커피 한 잔, 저녁 식사 후 커피 한 잔, 야근하면서 한 잔으로 하루에 4잔씩 마셨다. 어느 날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서 심장이 어떻게 된 건 아닌가 걱정하며 병원에 갔더니 위궤양 직전이라며 술, 담배, 커피를 멀리하랬다. (왼쪽 가슴에는 심장 말고도 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3가지를 한꺼번에 끊을 수 없어서 세 가지 다 조금씩 줄이기로 혼자 다짐했다. 커피는 최대한 줄인 것이 하루 두 잔이었다.
고객과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오후 2시에 파트너님과의 미팅이 있다. (컨설팅 용어 3. 파트너 : 잠재 고객사 대상의 영업 활동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전략 컨설팅 회사의 임원이자 실세. 프로젝트 실무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프로젝트 주인이나 다름없으므로 모든 진행 상황을 공유받고, 중요 사항들을 결정한다.) 필요한 내용을 빠르게 정리해서 주니어들에게 일을 배분한 후, 파트너님과의 미팅을 준비한다. 앞으로 보고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합의를 짓는 미팅이다. 가장 지난하고 머리 아픈 과정이다. 미팅 참여자 모두의 의견이 같으면 금방 끝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토론이 이어진다. 대부분 파트너님이 이긴다. ‘짬’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파트너님과의 미팅도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끝나고 나니 3시 30분이다. 아침부터 말도 많이 하고 머리도 많이 쓴 탓인지 오후 6시는 된 기분이다. 지쳤다는 뜻이다. 어차피 오늘은 긴긴밤이 될 것 같아 딱 30분만 쉬기로 한다. 잠깐 건물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오니 4시. 이제부터 본격적인 모델링의 세계로 (혼자) 떠난다. 방법론을 정리하고, 팀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수정하고, 확정 지어진 것들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정리하며 모델링의 기초 작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은 오늘 퇴근할 때까지 반복될 예정이다.
오후 6시 30분, 벌써 저녁 시간이지만 나는 일하는 중간에 집중력이 깨지는 걸 싫어한다. 일하다 밥 먹으러 나가는 것도 번거롭고, 뭘 먹을까 고민하는 과정은 더 귀찮다. 6주 간의 프로젝트 내내 써브웨이 로스트 치킨 샌드위치만 먹었던 적도 있고, 4주 동안 점심저녁으로 매번 같은 도시락만 먹었던 적도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스타벅스 ‘베치토’(베이컨 치즈 토스트)다. (여기에 딸기잼을 추가해서 먹으면 진짜 맛있다.) 어제도 먹었던 베치토와 커피를 사 오기로 하고, 팀원들은 따로 저녁 식사를 하러 보낸다.
회사 건물 1층 스타벅스에 갔다 오는 건데 무려 30분이 걸린다.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시간이 아깝다. 키보드 옆에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세팅을 해두고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밤 10시가 가까워지면 서로 오늘의 예상 퇴근 시간을 공유한다. 분명 예상 퇴근 시간을 물었는데, 모두 목표 퇴근 시간을 대답한다. 공격적으로 목표를 잡는 탓에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과연 칼퇴의 기준은 언제인가?’라는 주제로 한 차례 잡음이 인다. 기준이 어찌되었든, 칼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밤 11시, 예상치도 못한 시간에 퇴근을 한다. 오늘이 그 얼마 되지 않는 날 중 하나인 것에 감사해야 마땅하다. 아직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인데, 이럴 때 충분히 자둬야 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모델러를 맡은 이상 앞으로 4주 간은 하루에 2-3시간 밖에 못 잘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데이터 양이 방대하거나, 필요한 데이터가 잘 안 나오거나, 고객사가 데이터를 안 주거나, 고객사가 준 데이터 정리가 안 되어있다거나… 혼자 밤을 꼬박 새야하는 경우의 수는 끝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일단 퇴근하자.
*이 글을 쓰고 1년이 지난 후부터 나는 6시 기상을 관뒀다. 12시에 퇴근하는 날에도 어떻게든 수면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기상 시간을 7시, 7시 30분, 8시로 순차적으로 미뤘다.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컨설팅 퇴사 후 나는 대중교통 마니아가 되었다. 한 달에 1번도 택시를 안 탄다. 출퇴근길 지옥철도 거뜬하다. 아무래도 수면 시간을 늘린 것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