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이것은 불굴의 출근 기록이다.
저릿한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최근에 날짜와 요일이 같이 표시되는 디지털 시계로 바꾼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토요일이라고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각인 줄 알고 허둥댔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는 동안 발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일어나 앉아 이불을 걷었다.
왼쪽 발등이 평소의 2배로 부어올라 있었다.
“어… 엄마 나 발이 이상해!”
다급한 목소리에 거실에서 내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는 잠시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혀를 쯧쯧 찼다.
“술 마시고 가로수에 발차기 했니?”
그제서야 어제 술 마신 기억이 났다. 어쩐지 머리가 아프더라. 어제 함께 술을 마신 남자친구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주말에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는 애였다. 지금 전화를 받는 게 더 이상하지. 혼자 머릿속으로 어제 일을 되짚어 본다.
금요일이라 칼퇴를 했고, 남자친구의 회사 근처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가볍게 한 잔의 반주로 시작해 2병을 더 시켰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2차를 갔었나? 핸드폰을 꺼내 카드 이용내역을 찾아본다. 2차를 갔으면 내가 계산을 했을 것이다. 아… 2차로 와인을 마셨구나. 하필 머리 아픈 주종만 골라서 마셨다. 그러고도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신사역 8번 출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집에 나를 넣어두고 돌아서는 남자친구의 모습까지도. 그러면 집까지 잘 걸어왔다는 건데 도대체 이 발은 어디서 어떻게 다친 걸까?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서 살짝 걸어보니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멍이 들거나 부은 수준이 아닌 거다. 분명 어디 하나가 부러졌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근처 병원에 갈 준비를 하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첫 번째, 나와 싸우다가 화난 남자친구가 내 발을 밟았다. 실제로 자주 싸우긴 하지만 내 남자친구를 아는 모든 사람, 심지어 우리 엄마도 믿지 않을 문장이다. 차라리 화난 내가 남자친구의 발을 밟는 것이 더 신빙성 있을 지도.
두 번째, 걸어가는 길에 가로수에 발을 부딪혔다. 발을 부딪히는 것만으로 발등이 부러질 수가 있나? 작정하고 세게 차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텐데, 아픈 걸 제일 싫어하는 나 같은 쫄보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거기다 나는 어젯밤 분명히 멀쩡하게 걸어서 집까지 왔다.
세 번째, 자다가 발끼리 부딪혔는데 왼발이 졌다. 내 오른발이 그렇게 힘이 세지가 않을 텐데. 그래도 집에 온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신빙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쪽 발로 콩콩이를 하며 어렵게 찾아간 병원에서는 부끄러운 순간을 견뎌야 했다.
“어떻게 아프세요?”
“그냥 많이 아파요. 못 걷겠어요.”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모르겠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것도 모르겠어요.”
“어디에 부딪힌 거예요?”
“모르겠는데… 술을 마셔서.”
물음표만 띄우던 의사 선생님은 술을 마셨다는 한 마디에 모든 의문이 해결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레이까지 찍은 후의 진단은 결국 발등 골절. 회복까지는 무려 8주가 걸린다고 했다. 반깁스를 하는 도중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상황을 전하니 처음 하는 대답이 ‘말도 안 돼'였다.
“나 왜 이렇게 된 거야?”
“너…? 왜 그렇게 됐지?”
“어제 나 뭐 했니? 너랑 싸웠다던가, 가로수를 발로 찼다던가.”
“싸운 건 아닌데 네가 잠깐 화내긴 했지.”
첫 번째 가설 기각.
“가로수는 찬 적 없는데… 그리고 너 어제 집까지 잘 걸어서 들어갔는데. 내가 봤는데.”
두 번째 가설도 기각. 그렇다면 세 번째 가설…이 맞을 리가 없다. 골절의 이유는 미궁 속으로 빠졌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프로젝트.
6주간의 프로젝트가 지난 주에 시작된 참이었다. 내가 팀장인 탓에 다른 사람과 교체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일주일에 한 번 찾아가야 하는 고객사의 위치는 우리 회사에서 1시간은 걸리는 경기도였다.
병원을 나서는 나의 손에는 목발이 쥐어져 있었다. 토요일이었지만 당장 회사에 연락했다. 술 마시고 발이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운동하다 다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회사 사람들이 이 글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행히 회사 사람들은 내가 새벽마다 헬스장에, 주말마다 서핑하러 양양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프로젝트는 재택으로 전환되었지만 매주 있는 고객사 보고는 피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회사에서는 “이번 프로젝트 그냥 쉴래? 발 불편해서 집중이 되겠어?"라는 말을 들었지만 쉴 수 없다고, 일 잘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번 프로젝트 결과에 따라 나의 승진 여부가 결정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도 안 해본 재택 근무는 어떤 면에서 생각보다 더 편하고, 어떤 면에서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매일 샤워하고, 옷을 골라 입고, 1시간 동안 택시를 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확실히 편했다. 하지만 팀원들과 실시간 소통이 안 된다는 점은 불편했다. 사내 메신저로는 한계가 있었다.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꽤나 효율적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메신저로도, 전화 통화로도 내가 원하는 바가 한 번에 전달되지 않아 전화기를 계속 붙잡고 여러 번 설명해야 했다.
반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채로 고객사에 방문하는 일이 제일 문제였다. 고객사 방문 시에는 정장을 입는 것이 원칙인데 목발을 짚고 한 쪽 발에만 구두를 신을 수 없어 그냥 정장에 운동화를 신었다. 고객사까지 가는 것도 일이었지만, 도착해서 명함을 꺼내고, 악수를 하고, 노트북을 꺼내는 과정에서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진땀이 났다.
좋은 점이 있기는 했다.
“아니, 팀장님 이렇게 몸이 불편하시면 말씀을 하시지… 매번 새벽까지 일하시길래 몰랐습니다. 저희가 오늘은 추가 요청은 자제해보도록 할게요.”
목발을 짚고 낑낑대는 내가 불쌍해보였는지, 고객사 담당자가 말했다. 실제로 추가 요청이 없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래도 보내온 게 자제한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