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해답은 그가 근무하는 회사에 있다. 잠시 그가 다니는 회사를 들여다보자.
직장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다다. 일 안 하고 수다만 떠는 직원이 사장의 눈에 곱게 보일 이유는 단 한가지도 없다. 월급을 주는 입장에서는 단칼에 '파이어(fire)'를 부르짖을지도(도널드 트럼프가 했던 것과 똑같이).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업무 생산성에서 하위권에 머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것이 시스템의 문제이든 아니든 물건을 생산하는 데 써야 할 시간을 다른 곳에 쏟아붓고 있다는 소리인데. 직원들에게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유일한 창구가 그나마 수다라서 그런 뉴스를 들은 날은 왠지 회사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회사가 출근해서 주야장천 일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잠시 미안한 마음은 접어둔다.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것 또한, 이곳의 장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수다의 주된 주제는 역시나 먹고사는 이야기다.
"오늘은 점심 뭐 먹지? 시켜 먹을까? 나가서 먹을까?"
"이번에 새로 산 옷이야 어때?"
"나 어제 머리 했는데!"
"핸드폰 새로 바꿨어. 너무너무 좋아!"
라든가, 지난밤 방영했던 드라마 남자 주인공 또는 연예인의 가십거리 거나.
"아프냐? 나도 아프다."(드라마 다모에서 이서진이 하지원에게 한 것처럼, 2003년)
드라마의 명대사를 흉내 내며 수다를 떨고 낄낄낄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가벼운 대화로 떠들고 즐기기엔 이만한 주제도 없다. 이런 가벼운 이야깃거리가 질릴만하면 조금은 묵직한 주제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의식(衣食)'은 그다지 골치 아픈 문제는 아니다. 이거라도 걱정 없으니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의식(衣食)에서 '주(住)'로 넘어가는 순간 모두의 입에서 한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중 1순위에 꼽히는 건 단연코 '이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집을 '산(買)'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주제라면 탄식이 터져 나올 리가 없으므로. 어디로 가야 싼 '전세'를 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수다가 대부분이다. 간혹 아주 간혹 지방에 작은 아파트 하나 샀다는 이야기도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대부분 싱글족의 입에선 주로 원룸 기껏해야 투룸이, 기혼자들의 입에선 조금 더 넓은 평수의 집. 그래 봐야 방 두 개 거실 하나 또는 방 셋 거실 하나의 전세 이야기다. 이 회사에서 근무 경력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집은 회사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작은 기업에 다니다 보니 회사에서 대출받아서 집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저 하늘의 별을 따다 준다는 치기 어린 남자 친구의 말과도 같다. 이들의 고민은 아주 소박하다. 2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집값. 보증금을 올리지 않는 천사 같은 집주인을 만나길 희망한다. 그러나 재계약 날짜가 다가오면 현실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중기도 이사 얘기에 끼어들어 이런저런 고민을 쏟아낸다. 그러다 직원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경기도로 가요. 경기도가 그래도 싸잖아요"
그 직원도 서울에서는 전세 구하기 너무 힘들어 경기도로 빠졌다고 했다. 회사 동료의 그 한 마디가 나중에 뼈아픈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중기 처지에서 '차라리 경기도'라는 멘트는 한 귀로 흘려버리기엔 너무 솔깃했다. 그의 월급과 늘어만 가는 빚 때문이라도 뇌리에 콕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경기도로 빠지는 거야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회사에서 멀어지는 건 두렵지 않았다. 중기 첫 번째 집도 회사에서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에 있었고 그보다 더 힘든 건 대중교통 문제였다.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 시달리는 생활에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으므로.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건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하루의 시작과 끝을 밀폐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 그것을 피하고 싶어 경기도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의 주머니 사정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오로지 육체적인 피로에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경기도로 옮기게 된 결정적 한 마디는 다음과 같다.
"경기도가 그래도 싸잖아요."
그 '싸다'라는 단어의 울림은 강력했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몸의 피로쯤은 제압하고도 남았으니. 이런 연유로 경기도라도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에 두 번째 집을 찾는 행운을 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행운이자 또 다른 불행의 시발점이었다.
시프트(Sift)는 서울시가 도입한 장기전세주택 프로그램이다. 무주택자를 상대로 서울시가 주변 전세 시세의 50% 금액으로 2007년부터 시행한 정책이었다. 다시 말해 서울시 안에서 주변 시세의 반 가격으로 20년 장기 거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잘만 하면 2년마다 짐을 싸는 일은 적어도 20년은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기회다. 지금이야 정책이 변경돼 80% 시세로 올랐지만, 당시에는 돈 없는 서민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드디어 입주 공고가 떨어지고 입주자격 조건이 적힌 서류를 받았다. 정말 이것만 된다면 끔찍한 이사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중기 나이도 있고 무주택 기간도 길고 청약통장도 1순위를 달성한 지 오래. 만반의 준비는 다 끝났다고 자부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서류만 제대로 갖추어 제출하면 당첨이었다. 인생에 운과 불운이 돌고 돈다면 중기에게는 불운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역시나 불운이 '훅'하고 다가왔다. 입주자 선정 채점 기준표에 서울시 거주기간 항목이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일단 채점표를 보며 모든 항목에 점수를 매겼다. 안타깝게도 합격 기준 점수에 딱 1점이 모자란다. 재차 확인해보지만 1점이 부족했다. 중기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30년을 넘게 살았건만 두 번째 집이었던 경기도에 거주한 고작 4년이 문제가 되었다. 수십 년 서울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어이없게도 서울 거주 기간이 리셋되고 말았다. 결국, 서울시 거주 기간 점수에서 0점 처리가 되었으니. 좋은 기회는 일순간 날아가 버렸다.
“아! 어째 이런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야….”
중기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억울한 일을 겪었어도 이 만큼 분하지는 않았다. 끝끝내 끓어오른 부아를 호소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차라리 경기도로 가요. 경기도가 그래도 싸잖아요"
이 말이 중기에게는 다시 2년 주기 스트레스를 선물했다. 서울에서 그나마 저렴한 시세로 장기전세 아파트에 살고 싶은 사람들아! 절대 서울에서 벗어나지 말고 버틸 때까지 버텨라! 서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벗어나는 순간 서울 거주 기간은 다시 제로로 바뀐다는 것. 중기는 다시 점수를 쌓아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