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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리 Nov 07. 2018

캐비닛 [김언수]

발칙한 상상력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무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나의 뇌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어주는. 몇 번을 읽어봐도 이해가 가지 않아 금방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작품은 그저 따분할 뿐이다. 


13호 캐비닛에는 이상한 서류가 가득 들어 있다. 그런데 작가는 처음부터 말한다. 13호 캐비닛에 대해 굉장한 상상을 하지 말라고 못 박는다. 심지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은 일찌감치 집어치우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런 상상을 한다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고. 작가는 서두부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이미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도대체 13호 캐비닛에 뭐가 있길래?"


 주인공 공 대리의 일과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순히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고 괴상한 이야기만 한다. 출근해서 첫 전화는 자신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여인의 전화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지하철을 탔다가 몇 시간이 사라졌다고 하며 공 대리에게 따지듯 얘기한다. 시간이 사라지다니? 여자는 주기적으로 시간이 사라졌다고 억울해한다.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이번에는 샤워하다가 자신의 성기가 사라졌다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미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전화에 이골이 난 공 대리의 대답은 정말로 걸작이다. "밑에 잘 찾아보세요. 거기 떨어졌을지도 모르잖아요." 정말로 웃지 않을 수 없다. 말도 되지 않은 상황이 이 소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입속에서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 도플갱어. 메모리모자이커. 토포러.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남녀 성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 외계 행성에 전파를 보내는 사람 등등. 앞에 열거한 것처럼 이 책에는 생소한 단어들이 눈에 띈다. 그들 모두는 정상에서 벗어난 이상한 사람들이다. 즉 새로운 종의 인류다. 흔히 돌연변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지금 세상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공 대리가 관리하는 13호 캐비닛에는 이런 신인류의 기록이 적힌 서류가 375개나 들어 있다. 공 대리는 권 박사가 관리하던 13호 캐비닛의 파일을 몰래 보다가 들킨 죄로 이 파일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게 되는데. 13호 캐비닛에 있는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을 '심토머'라 부른다.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어쩌면 최후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는 그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저 캐릭터는 과연 어떤 능력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기듯, 심토머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는 어떤 미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변화된 새로운 종일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삶에 걸림돌이 되어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책에서도 심토머는 분명히 중간자의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과 미래에 태어날 새로운 종의 중간. 하지만 그들이 겪는 고민과 고통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예컨대 백화점 도우미로 항상 웃어야 하는 일만 하던 여자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조금은 과장될 수 있어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괴상망측한 인물들이 실상은 지금 세상에도 존재한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닐까. 지금 세상은 정말 심토머보다 더 자극적이고 흉측하며 상상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넘쳐나니까. 이야기 속 심토머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자신들의 아픔을 감추고 사라지거나 하면서 스스로 안고 살아간다. 오히려 키메라의(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비밀을 밝혀 이용하려는 인간들. 책에서는 기업에서 보낸 사람이라 말하지만 이른바 돈과 권력을 쥔 집단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캐비닛 속에 있는 심토머들이 이상한 돌연변이가 아니라 힘겹게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그리고 한 가지 재미난 것은 후반부에 공 대리가 기업에서 고용한 고문 기술자에게 당하는 장면은 정말 생생하다. 이런 장면이 바로 작가의 다음 작품 [설계자]에서 나오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부분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부분에서 조금은 엇나갔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상황의 묘사는 정말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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