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빌리려면 기다리시오!

8화

by 갸리

2002년도 어느새 가을이 깊어졌는지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도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오후 3시 30분. 후드득 소리를 내던 하늘이 갑작스레 소리 패턴을 바꾸었다.


후드득 솨아아! 후드득 솨아아!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비 본연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길바닥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내지 않고 당구대 쿠션처럼 사방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게 거꾸로 튀어 오르는 빗물이 청바지 밑단을 흥건히 적시는데 시나브로 차오른 물기가 종아리 부위까지 번져왔다. 젖은 청바지가 툭툭 맨살을 건드렸다. 다리에서 시작한 소름이 머리끝까지 도달하자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이런 느낌은 정말 싫다. 마음속까지 더러운 습기로 점령당한 기분이 들게 하니까. 운동화 속 발이라고 괜찮을까.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은 작은 구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빗물로 이미 양말도 질퍽해졌다. 은행 앞에 다다르자 중기 마음도 젖은 바지처럼 무겁고 울적한 감정이 밀려왔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할 장소인데 시작부터 균형이 무너졌다. 그렇지 않아도 오기 싫은 장소 이건만.




국민은행 xx 지점 현관 앞에 섰다. 오늘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심사가 있는 날. 중기는 회사에서 조퇴까지 하면서 다시 짜증이 치미는 공간에 와있다.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은행에서는 '돈냄새'가 났다. 바다에 가면 바다 내음이 나는 것처럼 은행도 자기만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돈다발에서 풍기는 시큼한 종이 냄새. 중기는 이를 돈냄새라 말한다. 돈 잘 버는 이들은 돈냄새를 잘 맡는다고 했는데 중기는 이곳에 와야만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런 냄새를 싫어해서 돈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건지도.


세금을 내는 사람, 송금하는 사람, 돈을 찾는 사람, 돈을 넣는 사람. 은행은 돈과 관련된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중기처럼 돈을 빌리러 온 사람. 바로 그때 중기 시선이 닿는 곳에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거기에 짜증을 유발하는 인간이 있다. 중기를 괴롭혔던 인간. 바로 그였다. 재수 없게도 그때와 변함없이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고객에게 틱틱거리는 말투는 여전했다. 중기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 저 인간이 왜 또 앉아 있지!
아휴, 오늘도 일정이 사납겠군."


중기는 이 불친절한 인간에게 오늘도 부탁하는 처지에 서게 됐다. 마치 임금님 앞에 신하들이 조아리듯이.


"하아아... 정말 이번에도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큰일인데.
신혼 단칸방 계약은 어쩌지?"


깊은 탄식과 함께 초조한 마음이 요동쳤다. 중기는 지난번 방문했을 때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자칫하면 결혼 자체에 브레이크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실제로 은행 직원이 대출 허가 권한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중기는 자꾸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오늘이야말로 헛된 걸음이 되지 않게 반드시 승낙을 받아야만 하는 날이다. 더는 시간과 기회가 없으므로.




가슴 졸이고 떨리는 시공간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틀림없다. 중기는 금융기관만 들어서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친근한 영역이 아닐뿐더러 은행에 자주 드나들 만한 삶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배우자에게 단칸방 전세라도 보여주려면 이번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중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니까. 이미 두 차례 와본 터라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중기. 번호 대기표 기계에서 능숙하게 종이를 뽑았다. 동그랗게 말린 번호표에는 대기 손님 3명이라고 적혀있다.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창구 앞에 마련된 의자에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앉았다. 중기는 그들의 얼굴을 조심히 살펴봤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 일거라고.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사람들. 돈을 빌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중기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물론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히 정해진 바 없다. 돈이 궁한 사람들의 용건이 끝날 때까지 30분이건 1시간이건 기다려야 한다. 어차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참고 참고 기다리는 길밖에 없다. 은행이 '갑'이라면 중기는 '을'이니까. 창구 직원이 '을'이라면 중기는 '병'이니까. 오직 인내심과 평정심만 필요할 뿐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지루함의 한계도 턱밑까지 다다랐다.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한계라고 했는데. 따분한 고통의 한계를 몸부림으로 해석시킨다. 턱을 괴기도 하고 다리를 꼬기도 하고 손가락을 조무락 거리며. 그렇게 몸을 비비 꼬며 하염없이 버텨보지만 대기 시간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아줌마의 상담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0분, 20분, 30분이나 지났건만 아줌마와 의자는 한 몸체가 되어 있다. 중기는 다시 몸부림 모드로 전환해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도 하고, 그것도 지치면 고개를 떨구고 졸기까지 한다. 이렇듯 돈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무의미하게 빠져나간다. 마치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이 이들의 시간도 줄줄 새고 있다.


'그래도 너한테 돈을 빌려주잖아. 시간이 뭐라고. 이 따위쯤은 낭비해도 당연한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짜증스럽고 무기력한 공간. 무언가가 소리 없이 힐책하는 기운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마치 돈을 틀어쥔 자의 꾸짖음이랄까. 숨을 쉴 때마다 인색한 공기가 중기 심장에 스며들었다.




담당 직원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상급자에게 필요한 사항을 질문하며 답변을 기다린다. 통화가 끝나고 수십 장이나 되는 서류를 복사하고 꼼꼼히 살펴본다. 돈 빌리러 오는 사람들의 사정은 전부 제각각이라서 그 업무를 전담하는 직원조차도 헷갈리는 사항이 자주 나타나는 듯. 무언가 잘못됐는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기도 한다.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어 또다시 타 부서로 전화를 돌려 물어본다. 그쪽도 알쏭달쏭한 문제라 쉽게 답변을 주지 못했던지 대기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지루한 시간은 계속된다. 다시 인내심이 필요할 때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은행 대출 상품과 복잡한 약관을 모조리 파악하지 못하는 직원. 이리저리 문의 전화를 돌리며 반복해서 답을 구한다. 하염없이 시간은 흐른다. 또한, 채무자들의 원금 상환 상태에 따른 이자 변동 폭과 다양한 변수가 대기 시간이 늘어지는 원인 중 하나다. 이렇듯 서민들은 돈 빌리기가 쉽지 않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문장으로 가득한 수십 장이나 되는 서류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어야 한다. 직원이 빨간 줄 그어 놓은 칸 외에는 한글인데도 도대체 알아먹을 수 없는 문구들. 병원에서 의사가 휘갈겨 쓰는 의료 기록처럼 말이다. 그들만이 이해하는 언어. 중기 같은 인간들은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사인만 하면 된다. 일일이 따져볼 겨를도 여유도 없이. 그런데 서류가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은행이 정한 기준에 미달하거나 하면 기나긴 시간 상담은 허사로 끝나버리는 일도 다반사라서. 저 아줌마도 제출해야 할 서류를 잊은 건지 이리저리 가방을 뒤적거려 봐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통과되지 않은 듯하다. 직원의 야박한 말투는 그때나 다름없다. 용무가 끝났다고 신호를 주는 직원과 용무가 해결되지 않은 아줌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아줌마. 중기는 이해한다. 그런 아줌마의 심정을.


"다음 손님."

직원의 손가락은 야멸차게 번호 버튼을 누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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