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회사는
현재.
2022년 2월
K-좀비가 국내를 넘어 글로벌로 확산하는 지금. 고등학생들이 뿌린 이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는 총알만큼이나 빠르다. 5G 시대를 맞이하여 기쁘다는 듯.
그에 비해 거북이보다 변화가 느린 이 공장. 작업 생산량은 좀비 바이러스처럼 나날이 늘어나지만 월급의 상승 속도는 평행선에 가깝다. 회사는 K-애니메이션 제작이 한창이다. 국산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만드니 K'자를 살포시 얹어 묻어가 보고 싶은 심정. 요즘은 'K'가 붙으면 프리미엄이 생기는 세상이니. 언젠가는 한국 애니메이션도 넷플릭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뉴스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여튼 이 공장에서도 매일매일 새로운 그림이 탄생하고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빌런이다.
대부분 알겠지만 그래도 무슨 뜻인지 찾아보았다.
창작물에서 악당이나 악역을 뜻하는 영어 단어. 판타지 세계에서 우리가 흔히 미국 히어로 물에서 빌런을 접한다면, 현실의 악당은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최고의 빌런은 누가 뭐래도 '윤귀남'이다. 그는 학교 내 일진 그룹의 제2인자. 일인자가 되지 못한 억울함 일까. 좀비가 되어서 찌질했던 이인자의 설움을 한없이 풀어내듯 극악무도한 캐릭터로 발전한다. 정말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악질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빌런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빨리 죽으면 재미없으니까. 감독이 오래 살려두는 캐릭터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극에서 빨리 죽고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난다. 이렇듯 세상만사 나쁜 짓 많이 한 놈은 왠지 명이 긴 듯하다.
이 공장에도 딱 귀남이 같은 캐릭터가 있다. 뭐 죽일 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인간. 한 마디로 짜증 유발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는 어느 회사에나 있지 않을까.
빌런 1의 머리통은 오늘도 의자 뒤로 넘어가 있다.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아가며.
아주 회사가 지 집 안방이다.
용감하게도 쿨쿨 쳐 자빠져 자고 있으니.
팀장한테 이르자니 동기로서 의리 없다는 말을 들을 것 같고. 참자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
이 바쁜 시기에.
어쩜 저리도 태평하게 잠이 올까.
철야 야근하면서 자는 거야 이해한다. 근로기준법을 무시한 과다 업무에 체력이 달려서 자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이 인간은 낮에도 자고 있으니.
나와는 DNA가 다른 족속인가.
이제 선적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나만 이게 뭐람.
아! 빡친다. 빡쳐!
나와 입사 동기인 빌런.
선적 스케줄이 코앞인 데도 이런 여유가 부러울 정도니.
팀장에게 할당받은 일의 양도 내가 훨씬 많다. 나한테만 왜 이렇게 일을 몰아주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하물며 월급도 내가 훨씬 적다는 것.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그와의 월급 차이가 꾀나 벌어져 있다. 우연찮게 동기의 월급을 알게 된 것이 오히려 역효과다.
열심히 일했는데.
정말.......
일하고 싶은 의욕이 뚝 떨어진다. 눈밑의 다크서클은 점점 더 넓어져 가는데 동기 얼굴은 멀쩡하다. 옆에서 쿨쿨 자는 저 인간이 얄밉기만 하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팀장이 볼 때는 잠을 자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는 척. 팀장이 없을 때만 자는 기묘한 능력자. 팀장은 이 인간의 실체를 모른다. 어디선가 귀남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청산아"라고 부르면서 청산이를 죽이려는 그놈의 목소리. 목을 드러내고 쿨쿨 자는 저 인간을 귀남이처럼 와그작 씹는 소리를 내듯 목을 물어뜯고 싶어 진다. 극에서 효산고 2학년 5반 반장 '남라'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물어뜯으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도 그런 외침이 들린다.
"물어뜯어!"
"배고프잖아!"
극에서 반장 '남라'는 친구를 물지 않으려고 자신의 팔을 물어뜯지만, 나는 아니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면 왁! 하고 물어뜯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몸엔 좀비 바이러스가 없다.
물어뜯기는커녕 눈앞에 쌓인 씬봉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숨만 터져 나온다.
일을 끝내야 하는데 시간만 잡아먹는 좀비 같은 저 인간. 스케줄에 차질이 생긴다. 오늘도 야근은 당연한 일이고 철야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워낙에 이 공장이 사람을 혹사시키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저 인간은 너무 심하다.
어느 날, 빌런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해"
"뭐하러 그렇게 몸 축내가면서 열심히 해!"
"대충대충 해"
그나 나나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에 가깝지만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당히 눈치 보며, 적당히 일하고, 욕먹지 않을 만큼만 일하는 빌런 1. 월급만큼만 일하는 센스.
어찌 보면 그렇게 일하는 게 합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와 정신을 갈아가며 열심히 일하는 나만 멍청이 인가. 그래서 내게만 팀장이 일을 몰아주는 것인지도.
창작물에서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하게 평가하는 게 빌런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는 배트맨보다도 조커가 극을 끌고 가는 느낌이 들만큼. 창작의 세상에서 빌런은 관객에게 높이 평가받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빌런은 나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안기는 존재에 불과하다.
나도 한 번쯤은 빌런이 되어 볼까.
"이청산! 어디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