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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리 Jan 27. 2022

하청공장. 7화

호텔 잡아줄게

"야! 호텔 잡았다"


연인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므흣한 기분에 그 순간이 빨리 다가오기만을 기다려지겠지. 

그러나.... 그 대사의 주체가 다르다면?

제발 그 입에서 이 말만큼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

이러다 죽을 것 같다.


벌써 삼일 인가? 아니네 사일 째네.


의자에 앉아서 쪽잠을 잔 게 벌써 이렇게 됐나. 며 칠이 지났는지 날짜 감각도 사라지고. 같은 옷으로 사일 째. 회사가 집이 되어버렸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이미 출근 시간이 가까웠다. 어제 새벽 5시까지는 버텼는데...... 마지막 렌더링 걸어놓은 게 아직도 안 끝났네.  

휴우.....


나는 주 7일 근무다.

아니 근무한 시간을 다 따져보면 주 10일 근무는 족히 되는 것 같다. 월급도 쥐꼬리인데 그 꼬리에 꼬리만큼 주는 철야 식대비가 내 월급의 3분의 1을 넘어선다. 야근 식대비 받아봐야 나가서 식당에서 밥 사 먹으면 3천 원 손해다. 일하면 일할 수록 점점 더 손해만 커진다.


지금 내 얼굴은 아마도 이럴 거야


1998년 여름.


이놈의 스케줄. 

"알지? 선적 내일 까진 거."

그 선적일을 맞추기 위해 내 얼굴은 언제부터 인가 팬더곰이 되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선적 스케줄은 지켜야 한다는 팀장. 이 회사는 세 군데 애니메이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곳에서 작업 끝난 그림이 모여든다. 덕분에 우리 모두 죽어나지만. 22분짜리 애니메이션 20편을 한 달에 작업해야 한다. 이게 얼마나 많은 분량인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22분 애니메이션 한 편에 대략 3,3000 장의 그림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매달 약 66만 장의 그림이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되고, 수정까지 더한다면 어림잡아 86만 장의 그림을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해야 하는 셈이다. 


회사는 그래서 2교대로 돌아간다. 스케줄도 스케줄이지만, 비싼 기계를 놀리고 싶지 않다는 오너의 뜻도 있지 않을까. 

작업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 키보드를 세게 두드리다가는 팀장한테 이런 말을 듣기 일쑤다. 

"야 인마! 컴퓨터 소중히 다뤄"

"그게 얼마짜린 줄 알어?"

"니가 몇 년은 일해야 살 수 있는 컴퓨터야!"

팀장은 매번 이 회사 컴퓨터에 대해 자랑을 하곤 한다. 아무나 만질 수 없는 컴퓨터고 비싼 컴퓨터라고. 한 마디로 '워크스테이션'이라고 부른다고. 그냥 PC가 아니라 '워크스테이션'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내 월급 18개월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내 자리에 있는 컴퓨터 1대 살 수 있는 금액이니.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값비싼 워크스테이션이 필요했고 미국에서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일한 솔루션이었다. 거기에 소프트웨어까지 한다면 금액은 배로 늘어난다. 그렇게 비싼 장비의 본전을 뽑으려면 회사는 쉬지 않고 가동해야만 했을 것이다. 


팀장은 틈만 나면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니들이 이런 장비 만지는 것도 행운인 줄 알아라!"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행운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행운은 몇 포대로 갖다 줘도 반갑지 않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


화장실에서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씻고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찬물로 씻었는데도 정신이 개운치 않다. 잠이 덜 깬 건지, 잠이 부족한 건지. 끽해야 두세 시간 쪽잠으로 제정신을 차린다는 게 말이 안 되겠지.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몸을 뒤로 최대한 젖힌다. 끼익 소리를 내며 뒤로 꺾어지는 싸구려 의자. 삐걱삐걱 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이미 활력 잃은 눈은 무겁게 감기려 한다. 잠시 힘들게 눈 한 번 깜빡이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파티션 위로 눈과 코만 보인 채로 팀장이 내려다본다. 반갑지 않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얼굴을 돌려 그 시선과 마주쳤다. 

"좀 잤냐?"

'잤냐고? 얼굴 보면 몰라. 이게 잔 얼굴이냐고!' 

속에서는 천불이 난다. 


입이 말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억지로 대답한다.

"네....."

"얼마나 했어?"

"거의 끝났어요."

그런데 팀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웃고 있는 느낌이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고생하는 부하 직원이 안쓰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건....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를 직원이 잠도 안 자며 완수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미소였던 것 같다. 

피곤에 절은 얼굴을 보고서도 빨리 집에 가라는 소리는 하지 않고 "얼마나 했냐"라고 묻는 팀장. 그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오늘도 퇴근하지 못한 채 바로 업무가 시작됐다. 

몇 시간이 흐르고 팀장이 자리로 오더니 모두에게 전달사항이 있다고 한다.


"야! 호텔 잡았다"

'호텔을 잡다니 뭔 소리래'


"오늘부터 24시간 풀가동이다."

'뭐 언제는 풀가동 안 했나'

"회사 근처 호텔에 방 두 개 잡았으니까 거기 가서 자고 바로 출근해라."

"남자, 여자 따로 두 개다."

이 말인즉슨 집에 가지 말고 호텔에 들어가서 잠깐 잠을 자고 나오라는 뜻이다. 스케줄 상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사치라는 말. 우리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밤새는 것도 모자라서 호텔 투숙이라니. 깨끗한 호텔도 아닌 말이 호텔이지 여인숙 수준의 호텔에서 잠을 자라니.


그날 저녁 늦게 나는 집이 아닌 호텔로 갔다.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집까지 지하철을 타고 갈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이라 불리는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침대도 하나 없는 달랑 방 하나. 그나마 문 닫을 수 있는 방에서 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측의 배려에 고마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 후줄근한 방에서 지친 몸과 정신적 피로 때문인지 저절로 눈이 감긴다. 

아....

내일도 같은 옷으로 출근해야 하는구나.


그날 밤 팀장은 호텔로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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