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떠날 이유

직장인으로 25년, 그리고 나의 미래는 무엇일까?

by 나만의 결
난 죽어가고 있다
스무 해를 매일 아침 향하던 곳
쉼이 필요해서 가끔 도망치듯 피하던 곳
나는 그곳에서 죽었다


수많은 계산과 판단 속에 수많은 충돌이 있었다. 내 안의 두 마음은 어지간히 나를 괴롭혔다.


'이건 아니야, 떠나자. 의미도 보람도 없어.

'나에겐 미래가 필요한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잘하면서 왜 그래. 어쩌려고? 방법이 없잖아.'

'정말? 이렇게 답답한데 괜찮겠어?'


불과 얼마 전, 또 한 번의 정리를 할 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한 번씩 정리를 하면 당분간 어지러운 생각이 덜 했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수백 번 생각한 것들을 표현하고 다잡는 시간이 몇 번 필요했던 거다. 앞으로 1년을 잘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수백 번, 1년 365일, 매일 여러 번 떠오르는 생각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내 마음 내 뜻대로 안 된다. 계산하고 판단해 봐. 너에게 선택지는 없어.




40여분을 차로 달려 도착한 회사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긴 한숨을 쉰다. 아직 잠도 덜 깬 것 같은 멍한 느낌, 물도 없이 삼킨 고구마 때문인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온다. 시동을 끄고 잠시 눈을 감는다.


'좀 더 있다가 올라갈까? 피곤한데 20분만 자고 출근할까?'


다행히, 너무 익숙해진 탓에 회사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의 크기는 어릴 때 느끼는 정도의 크기는 아니다.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지는 않지만. 내 일의 영역에 제한이 없고, 수준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내 일의 영역에 제한이 없고, 수준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 자체로 스트레스이지만, 난 베테랑이다.

이 거대 조직에서 벌어지는 일들, 내가 다루는 업무들에 관심이 점점 사라진다. 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도 강해진다.


동료 후배 들과의 회식은 같이 일하는 사람 들과의 유대감을 위해 필수적이고 위안을 삼는 도구였지만, 이젠 의무감으로 참석하는 회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가끔, 치인다. 일의 범위가 없다. 깊이의 끝도 없다. 회의가 많다. 보고서가 많다. 도대체 어디까지 봐줘야 한다는 말인가? 적당히 하라고? 그렇게는 못하겠다. 최소한의 직업적 윤리의식은 있어야 하는 거다. 무엇보다도 동료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기는 싫다.


하루 10시간 11시간을 이곳에 투자한다. 자고로 투자란 미래와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어떤 날은 골치 아픈 문제에 투입한 에너지가 저녁 즈음엔 소진된다. 내 에너지 통은 별로 크지 않은가 보다.


단 10초 동안 제목이라도 읽어야 하는 메일이 하루에 150통이 온다. 출근 직후 족히 한 시간은 메일만 봐야 한다. 조치하는데 5분 이상 걸리거나, 위임을 하기 전에 추가 검토해야 하거나, 직접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것들은 따로 모으는 데도, 그저 파악만 하는데도 말이다.


같이 하는 사람들은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가르치면서 일해야 한다. 6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내가 혼자 몰빵 할 수도 없고 믿을 만하거나 확실한 역량을 가진 사람도 안 보인다. 물론, 내가 없어도, 내가 덜 신경 써도 굴러는 갈 거다. 그런데 그걸 두고 보기는 어렵다. 책임에 대한 비난을 받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을 못하겠다.




대기업의 부서장이다. 권한보다 책임이 훨씬 많은 사람. 작은 조직을 리드해야 하면서도, 직접 해야 할 업무도 많다. 이 거대 조직은 부서장들에게 잔혹하고, 그 덕에 많은 이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부서장을 고사한다.


사실, 이런 조직문화가 생긴 건 불과 반 십 년 정도밖에 안된다. 10년 이상 선배들의 시대에는, 부서장 자체로 권위가 있었고 권한과 책임이 컸다. 하지만, MZ 세대의 대거 유입과 더불어 모든 사회가 예전 같지 않다.


사회가 잘못되어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거대 조직을 예전처럼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거대 조직은 변화의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듯하다. 정말 이 거대한 배가 어디로 가는 걸까?


10조 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했다는 소식이 절망감이 든다. 경영층은 우리 회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됐구나. 아니지, 모르는 게 아니라 경영층 또는 오너* 집단을 위해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니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그리고, 회사 그 자체와 구성원은 우선순위에 들지 못한 거겠지.




이런 걱정을 하는 이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 든다.

'누가 누굴 걱정하냐…'

나를 꺼내라



* 오너 : 이 말 참 싫다. 회사가 개인 소유물도 아니고 오너라니. 시작에 대한 공은 크게 부여해야 하겠지만, 이 거대 조직은 사유물이 아니란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