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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루시아 Oct 27. 2024

@를 입력할 수 없는 키보드

20230124 교환일기

"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 이런 대담한 질문을 했다. 

아마 남을 위해 희생한 예수를 얘기하다 나온 질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목사님의 대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목사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열심히 설명해주셨지만, 그 대답은 여전히 나의 의문을 풀어줄 수 없었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굳이 남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까.' 


그리고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지금, 나는 내 질문이 엄청난 무지함과 오만함에서 나왔다는 걸 인정한다.

1월 3일 프랑스 땅을 밟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앞으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다. 


오늘은 프린트를 할 서류가 있어서 학교에 프린트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갔다.

한국에서 프린트를 하던 방식을 생각하고 usb를 가지고 갔는데 웬걸,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프린트를 진행해야 했다. 다행히도 교환학생들을 위해 영어로 된 프린터기 작동 방법이 벽에 붙어있어서 읽어봤는데, 프린터기 옆에 있는 컴퓨터에 내 학교 이메일 주소를 입력해서 로그인을 하고 인쇄 버튼을 눌러야 내가 원하는 서류가 프린터기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로그인만 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컴퓨터에 내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려 했는데 키보드가 프랑스식이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영어는 쳤는데 이메일 주소에 꼭 들어가는 '@' 가 문제였다. 자판을 보면, 0과 a와 @가 동시에 있다. 알다시피, 한국 자판은 하나의 키에 최대 2개이기 때문에 한 번은 shift 키를 동시에 눌러보고, 한 번은 눌러보지 않으면 2개의 원하는 문자를 쉽게 입력할 수 있다. 근데 3개라니, 기출문제만 열심히 공부했는데 완전히 딴판인 문제를 만난 기분이었다. 일단 한국 자판에서 하던대로 한 번은 shift키를 누르고, 한 번은 눌러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딱 필요한 '@' 문자만 빼고 0과 a가 입력되었다.. 결국 구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겠다 싶어 '프랑스어 자판 @', '프랑스어 자판 @ 치는 법' 과 같은 검색어를 남발해보았다. 하지만 구글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 선에서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끝나자 교환학생 톡방에 도움을 요청해볼까, 버디에게 물어볼까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것도 못하나?' 하는 괜한 오기가 들기도 하고 수업을 듣고 있을 다른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다.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아서 눌러보지 않았던 키들을 하나하나 눌러보며 @ 키를 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내 뒤에서 'Can I help you?' 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린터실 옆 방을 쓰고 계신 교수님이신 것 같았는데, 내가 컴퓨터 앞에 계속 앉아있으니까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찾아오신 모양이었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프린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절차를 영어로 설명해주시고, 내가 계속해서 문제를 겪었던 @키를 입력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는 shift키가 아닌 완전히 다른 키들을 조합해야 입력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도움이 필요함을 눈치로 알고 먼저 다가와주신 교수님께 'merci beaucoup' 로 감사함을 전달한 후, 나는 장장 1시간만에 프린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어떤 사람의 입장에 직접 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린터기 사용방법을 영어로 적어 벽에 붙이던 분은 누군가는 키보드 자판조차 제대로 다룰 줄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위험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하나는, 지금껏 내가 혼자 이뤄왔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키를 입력하는 것은 프린트를 성공하는 데 있어 굉장히 작은 과정이다. 때문에 이를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결과적으로 프린트를 해낸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쉽게 잊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잘해서' 어떤 것을 해냈다 라는 생각은 내 자신만의 착각일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을까? 

문자 하나를 입력하는 데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입장을 겪어본 사람은 답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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