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미 탐험가 이숙경 Jun 22. 2023

당근꽃 보러 가는 길

마을 식당에, 협동조합 하우스 일까지 겹치니 직장인 못지않게 바빠졌다. 그렇지만 오늘은 꼭 당근 꽃을 보러 가야 한다. 엊그제 광민이 당근 꽃을 보았다고 했는데  너무 궁금하다. 직접 보려고 일부러 사진도 찾아보지 않았다.


 하우스 깻잎이 냉해를 입어 상태가 좋지 않아 수확을 이틀에 한 번만 하기로 한 덕분에 아침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마침 마을식당 메뉴도 찬 밥을 이용한 야채밥이라 쌀을 씻어 놓지 않아도 된다.  장갑을 끼고 커다란 가위도 챙겨 밭으로 향했다. 어제 밭으로 가려다가 풀이 너무 자라서 가지 못했다.


마당을 지나가려는데 데이지와 금계국이 길을 덮을 지경이다. 그중에서도 금계국은 좀 많이 거슬린다. 키가 커서 다른 꽃들을 가릴 뿐만 아니라 혼자서 땅을 다 차지해 버리려고 한다. 큰 가위로 잠깐만 잘라줘야겠다.  

금계국과 데이지를 잘라내고, 그 안에서 자라고 있던 쑥이며 잡초들도  제거했다. 그런데 발밑에 해바라기를 닮은  꽃이 내 발을 붙잡는다. (며칠 후 이 작아 보이는 꽃이 금계국보다 훨씬 더 마당을 덮고 있다.)


파쇄석이 깔린 마당 여기저기에 앙증맞은 꽃들이 내 발을 붙잡는다.


밭으로 가는 길목에 신우대며 키 큰 잡초를 자르고 있는데 이웃 아짐이 낫을 들고 오신다.

"낫으로 하면 편해, 이봐 이봐 이렇게... 두 손 다 쓸 필요도 없어. 한 손으로도 여 여...이렇게.."


오!!! 바로 내가 원하던  번쩍번쩍 날이 빛나는 면도날표 낫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부터 낫을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데나 처박아 둔 탓에 찾기도 힘들었고 막상 찾은 낫은 녹이 심하게 슬어버려서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광민에게 낫을 다시 사자고 했지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낫을 손에 든 나는 당근 밭 가는 길을 덮은 풀과 신우대를 제거하고는 당근 밭의 반대 방향인 과수원으로 갔다. 날카로운 물건들을 유난히 무서워하는 나지만  잡초들과 잡목, 신우대등이 과수들을 덮고 있는 모습에 전투력이 불붙었다. 풀을 베다가 내가 잃어버렸던 톱도 찾아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낫질을 신나게 하는 동안 해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옷이 땀에 젖기 시작한다. 이제 당근 밭으로 가기에는 시간도 체력도 부족한 상태다.( 바쁘고 힘들었던 도시 일상이 다시 습관이 되어 나를 덮어 버린다.) 체력이 부족한 건 맞지만 시간은 왜 부족하지??


난 내 시간의 주인이고 당근 꽃을 보러 가는 길도 아주 가깝다. 마음을 다잡고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당근 꽃을 보러 갔다. 하지만 엊그제 광민이 멀리서 보여준 흰 꽃무리는 가까이 가도 보이지 않는다. 작고 귀여운 노란 꽃 한 송이가 있었지만  다른 들꽃이었다. 겨우겨우 당근 밭 한 구석에서 다 져가는 당근 꽃 부스러기를 찾아냈다.


오늘 큰 결심을 하지 않았으면 난 이 당근 꽃부스러기조차 보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기다려 주지 않고 참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이름 모를 화려한 꽃이 나를 반긴다. 나중에 사진을 보여주니 광민이 당귀꽃이라 한다.


당근 꽃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예쁜 당귀꽃에 내맘이 꽃처럼 화사하게 밝아졌다.


이른 은퇴를 한 지 햇수로 5년인데 ’여유‘는 아직도 내가 가지고 싶은 보물이다.



작가의 이전글 두 언니와 배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