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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 탐험가 이숙경 Jun 05. 2023

두 언니와 배추

은혜언니와 정희언니

2023년 5월 29일 월요일


해가 길어질수록 시골살이는 바빠진다.

수확도 해야 하고, 수시로 여기저기 침범하는 대나무며 가시 덩굴도 제거해야 한다.

오전일을 마치고 막 쉬려는데 배암골 정희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 내 집 고구마 하우스 일로 바빠 몇 주째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 잘 있었어, 동생! 근데 요즘 마을 식당 안 해?"

"아니요, 계속하고 있지."

"그래? 어제 내가 회관에 배추를 좀 갖다 놨는데 아짐들이 누가 할 사람도 없고, 먹을 사람도 없다 하더라고. 다시 가져오기도 그래서 그냥 두고 왔어."

"언니 속상했겠다. 배추는 뭐든 만들 수 있으니까 제가 마을 식당에서 잘 먹을게요."

"그래. 내가 속상해하더라는 얘기는 하지 말고, 잘 먹어. 내가 바빠서 요즘은 못 가지만 시간 되면 갈게."


정희 언니한테 큰소리는 쳤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실은 우리 집 온실에도  내 손길을 기다리는 배추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 포기가 날마다 커져가더니 더이상 자랄 수 없는 지 겉잎이 시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해남에 내려온 지 4년째 어머님들의 김치를 먹다 보니 게을러져서 김치 담을 엄두도 나지 않는다.


언니가 가져다 놓은 배추는 얼마큼일까?


마을회관 문을 열자 커다란 자루 두 개에 작은 알배추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내 마음도 배추자루만큼이나 무거워졌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화투 치는 엄니들을 향해 말했다.


"이 배추로 쌈도 싸 먹고, 나물도 하고, 국도 끓이면 되겠다."

"여름배추는 나물하고 국 끓이면 맛없어야."

"그래요? 그럼 겉절이해야 하나? 아짐들도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아짐들 중 한 분만이 두어 개 가져간다 하시고 거의 흥미가 없으시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여전히 회관 문간에서 배추들은 점점 시들어 가고 있다.

어제 쌈으로 몇 개를 이용했지만 줄어든 표시도 나지 않는다.

배추를 보며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는데 오늘 요리 담당인 은혜언니가 도착했다. 은혜언니는 며칠 전 우연히 우리 마을에 방문했다가 마을 식당 자원봉사자가 되어 수요일마다 오기로했다.


"웬 배추야?"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주방으로 갔는데 한 구석에 있던 건고추 봉지가 은혜언니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제 장을 보며 김치 담을 생각도 자신도 없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집어 들었던 고추 봉지다.투명 셀로판지 봉투 속 새빨간 건고추가 너무 이뻤다. 하지만 역시 집에서는 자신이 없어서 회관으로 가져왔다.


"이 고추 조금 불렸다 갈아서 배추김치 담으면 되겠네. 점심 끝나고 하자."  


'점심 한 끼 치르는 것도 힘든데 그걸 끝내고 김치를 만든다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점점 시들어가는 배추들을 더 이상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배추를 자르고, 씻고, 절이고, 풀을 쑤고, 최대한 간단히 양념을 준비했다, (절이는 동안 은혜언니는 정미연 씨 밭에 구경까지 다녀오고 나는 회관 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배추가 알맞게 절여지고,새우젓으로 간을 했는데 빛깔도 곱고, 삼삼하니 맛있다. 아짐들께 맛을 보게 하면 싱겁다 할 것 같아서 익은 후에 드리려고 했는데, 김치 냄새가 아짐들을 자극했나 보다. 김치 맛보시겠다며 달라 신다. 그런데 의외로 맛있다시며 세 접시나 드셨다.


맛있는 김치가 완성되니 피곤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은혜언니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녁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6월 1일 목요일

회관의 묵은지를 정리하기 위해서  김치찌개를 했다. 김치가 주 재료인 김치찌개를 했기 때문에 김치를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니들이 김치를 달라고 하셨고, 내놓은 김치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김치를 할 사람이 없는 것은 맞는데 먹을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무래도 틀렸다.


6월 6일 월요일


정희언니와 은혜언니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분명 이 맛난 김치는 손 큰 정희언니와 손 빠른 은혜언니의 공동 작품이다.

소심한 내가 큰맘 먹고 집어든  '예쁜 건고추'가 품이 넉넉한 두 언니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냈다.

 

지난주까지 마을 식당 10주를 마쳤고, 오늘은 11주째 장을 보는 날이다.

해는 점점 길어져서 할 일이 점점 많아지니 글 쓸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수많은 재밌고 애틋한 이야기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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