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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 탐험가 이숙경 Mar 03. 2024

새벽사용 1일 차 후기

2024년 3월 3일 일요일 


새벽 두 시 조금 넘어 잠이 깼다. 화장실 가는데 몸이 아직 덜 깼다. 다른 때 같으면 달아나는 잠을 붙잡으려고 눈도 감은 채 오줌을 누고 얼른 이불속으로 들어갔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화장실 거울 속에 나를 보며 미소 지어 주었다. 오늘도  새벽을 사용할 만한 내 몸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어제 일기

새벽사용 1일 차

어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인생에 비밀이라도 건져낸 기분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못지않게 새로운 시간의 원리를 찾아낸 기분이다. 나에게 만성적으로 있었던 많은 강박들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그동안 나의 약한 몸은 항상 쉼을 원하고 제한된 하루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었다. 강박이 사라지니 마음과 몸이 함께 편해진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새벽에 내가 하고 싶은 대부분의 일을 마치느데  3시간 정도 걸렸다. 아직 새벽 다섯 시 밖에 안되었는데 나머지 시간은 온통 보너스였다. 어제 갑작스럽게 추워진 덕분에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새벽잠도 더 잘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6시가 좀 넘었는데 밖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3월에 눈이라니 그것도 해남에. 올 겨울이 계속 따뜻하더니 그냥 가기 좀 섭섭했나 보다. 

겨울과 봄의 경계선. 3월의 눈이  따스한 햇살 속에 버티고 있다.


아침을 먹고 마을 아짐과 병원 예약이 있어서 다녀온 후에도 아직 한창 아침이다. 광민이 정원일을 하고 나는 점심준비를 했다. 날은 점점 화창해지고 집에만 있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다. 광민이 어디라도 놀러 가자고 했다.

다른 날 같으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망설이는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점심을 먹고 광민과 미황사에 갔다. 서울서 출발했다면 새벽부터 출발해서 기진맥진 도착할 시간쯤에 우린 여유 있게 점심을  먹고 15분 만에 미황사에  도착했다. 숲길이 황홀한 날이다. 멀리 산들 사이로  마치 운해처럼 보이는 바다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내가 걸을 길이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다. 우리는 딱 만 보정도만 걷기로 했다. 5천 보 정도에서 돌아오기로 해서  앱으로 두세 번 확인했는데 우리 예상보다 걸음수가 훨씬 많아 놀라웠다.  만 보를 넘게 걸었지만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좋은  숲길을 만들고 가꾸신 분들께 감사하는 맘으로 걷다가 문득문득 보이는 쓰레기를 보며 광민이 속상해했다. 속상해하지 말고 우리가 주웁시다. 쓰레기를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나 보지.  다음부턴 쓰레기 주울 준비를 해가야겠다.

광민이 오랜만에 나들이했으니 저녁 외식을 하자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이르다.  게다가 이 계절을 놓치면 안 되는 냉이 양념장과 쑥 된장국은 정신이 바짝 나고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질 만큼 맛있다. 내일은 냉이를 캐서 아들 며느리에게 양념장과 구운 김이라도 보내주고 싶다.


 

숲길에서 만난 이름 모를 이끼 꽃무리


마을에 돌아오니 아짐들이 호박죽을 만드셨다. 호박에 밀가루를 수제비처럼 떠 넣어 만든 죽이다. 사람들과 산다는 것은 내 계획대로 인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쑥 된장국은 내일 아침 메뉴로 양보하고 아짐들이 정성껏 만드신 달콤한 호박죽으로 하루 피로를 말끔히 풀었다.


영화 감상

저녁엔 '비밀'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마음이 아주 아프고 무거웠다.

영화에 두 번 나오는 몇 초짜리  짧은 과거의 영상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감독은 전반에 알고 죄를 저지르는 악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결말로 갈수록 다른 죄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저 단순한 오해를 하고 흔한 편견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 어느 순간 깊은 참회를 하게 된다. 


영화는  모르고 저지른 죄를 깊이 참회하는 주인공을 다른 악당들과 달리 용서해 주는 듯 보인다. 그래도 주인공은 그런 악랄한 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영화의 끝부분쯤 아까 말한 몇 초짜리 반복되는 영상에 주인공의 짧은 대사를 들려줌으로써 정작 비극의 결정적 원인은 '너의 작은 오해와 편견'이었음을 그래서 '니가 결국 가장 나쁜 놈이었음을'각인시킨다.


내가 범했거나 범하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하나라도 찾아낼 있는 지혜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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