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정산 2025_자격지심

by 경이

지난가을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W와 S를 만났다. 우리는 같은 일을 했고, 우리가 했던 일을 그들은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지내냐고,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고 처음 연락 왔을 때, 반가우면서 겁이 났다. 대화에 못 끼면 어쩌지? 자격지심이 들면 어쩌지? W와 S를 시기하는 걸 들키면 어쩌지? 그들은 몰랐다, 내가 업계를 떠난 지 한참 됐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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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아무래도 바빠서 못 가겠다” 말할까 망설이는 때가 많아졌다. ‘바쁘다’는 건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포트폴리오를 수정하느라 매일같이 바빴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보는, 일터에서 의지가 돼 주었던 사람들을 잠깐이라도 못 볼 만큼 바쁜 건 아니었다.

‘자격지심 느낄 게 뭐람. 그동안 나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이 또한 사실이었다. 며칠 전 모니터를 보는데 눈이 욱신거렸다. 곧 따뜻한 기운이 퍼져 거울을 보니, 눈 흰자에 빨간 물감 같은 게 번져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거였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앉아서 작업만 한 날이었다.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한참 전부터 나는 이렇게 지냈다.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다. 열심히 살았다, 돈만 안 벌었다 뿐이지.

언젠가 바닷가에서 본 미역 한 줄기가 생각났다.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미역. 어디에 닿을지 모른 채,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부유하던 미역. 내가 꼭 그 미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계속 무게를 더하고 있는데, 내 삶은 버거울 만큼 무거운데, 왜 아직 나는 부유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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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가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곧 S까지 픽업해, 우리는 한적한 카페로 들어갔다. 역시나 반가웠다. 못 본 새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더해진 것 말고 우리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보니 정말 좋았다. 어디서 일하냐, 요즘 업계가 이러한데 그곳 사정은 좀 어떠냐, 괜찮냐, 일할 만하냐 등등의 말이 오갔다. 나도 곧 예상했던, 걱정했던 질문을 받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나는 요즘 내가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업계를 떠난 지 좀 됐으며, 1년 정도 방황하다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돼 배우고 있다, 지금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요즘 포트폴리오 만드느라 바쁘다, 이 나이에 돈 안 벌고 계속 배워도 되는 건지, 다시 신입으로 일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그래도 지금 배우고 있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놀지 않았음을, 열심히 마음고생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걸 증명하려듯 말한 것도 같다. 좀 부끄러우면서도, 속이 시원했다. 감추고 있던 걸 털어놓은 기분이었다. 감출 필요도 없는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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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에 했던 일을 정말 좋아했다. 돈도 쥐꼬리만큼 버는 일이지만, 그 일을 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늘 잘하고 싶었고, 잘하지 못하는 내가 늘 싫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나는 내가 했던 일을 지금도 좋아한다. 여전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할 자신은 없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나를 지켜 낼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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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가 말했다. 직장에 다녀도, 앞으로 뭐 하면서 먹고살지 불안해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언젠가 TV에서 70대 할머니 인터뷰를 봤는데, 자신의 나이가 60만 됐어도 하고 싶은 거 다했을 거라 했다고. 지금의 나, 절대 늦지 않았다고. 새롭게 도전한 거 멋지다고. 내가 배우고 있는 거, 나한테 정말 잘 어울린다고. 마지막 말에 S가 내 어깨를 때리며 맞장구쳤다.

우리가 했던 일을, 나는 포기한 일을 지금도 잘하고 있는 W와 S가 부러웠다. 시기심은 들지 않았다. 다행이다. 내가 많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 자격지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마주할 만했다. 정말 다행이다. 그들과 수다 떠는 시간이 편안했다. 그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나는 아직도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다. 내가 닿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내년에는 어딘가에 좀 정착하면 좋겠는데. (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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