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정산 2025_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워

by 경이

얼마 전 처음으로 ‘의뢰인’이 있는 작업을 했다. 이전까지는 내가 작업자, 가상의 의뢰인 역할을 모두 맡아서 혼자 작업했는데, 처음 다른 이의 필요와 요구에 맞춰 일했다. 다른 이와 함께 일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는 내내 협업하며 일했기 때문에, 일하는 방식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겁이 났다. 내가 또 마감 기한을 지키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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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할 때 나는 완벽주의가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다 보니 마감일을 넘기는 때가 허다했다. 나는 그야말로 나를 ‘갈아넣으며’ 일했다. 모든 프로젝트에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해냈느냐 하면, 아니다. 꼭 어딘가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나는 내 결과물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감일도 못 지켜 놓고,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까지 줘 놓고 겨우 이 정도라고? 나를 더 갈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더 갈아 넣을 게 남아 있었다니, 신기하고도 실망스러웠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때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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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일을 끝낸 적 있다. 처음이었다, 마감일을 지킨 때가. 불안했다. 제대로 끝낸 게 맞나? 이미 수십 번 본 내 결과물을 보고 또 봤다. 더 본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상사에게 매번 혼나기만 했는데, 칭찬을 들었다. 이번에 해냈으니, 다음에도 잘 해낼 거라고 북돋아 줬다. 더 불안해졌다. 내가 정말 제대로, 완벽하게 해낸 게 맞나? 내가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나? 상사가 내 실수를 발견하고 실망하면 어쩌지?

사실 나는 내가 나에게 또 실망하게 될 일이 두려웠다. 내 부족함을 다시 마주할 일이 못 견디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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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업은 처음 얘기됐던 것보다 일정이 빠듯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손도 느린데. 하지만 이미 약속된 일이었고, 정말 하고 싶은 프로젝트였다.

의뢰인과 협의해 중간 논의 과정은 생략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기한 내 1차 결과물이 나오는 데 서로 만족하기로 했다. 시간을 쪼개 사전 작업을 진행했다. 실제 작업할 수 있는 며칠 동안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작업에 몰두했다.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내 담았다. 다행히 논의할 틈이 틈틈이 생겨 의뢰인과의 논의도 충분히 했다.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결과물이 나왔다. 몇 번의 의뢰인 검토와 나의 수정 끝에 최종 결과물이 나왔고, 기한 내 프로젝트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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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에게 결과물을 처음 보낸 날, 사실 나는 보내기를 망설였다. 내 노력에 대한 의구심이 여지없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다른 한구석에서 이런 마음도 들었다. ‘지금 이거보다 얼마나 더 잘하냐, 엉?’

내 결과물은 완벽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부족했다. 하지만 당장 더 잘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내 결과물이, 내 노력이 썩 마음에 들었다. 마침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나는 아직도 ‘나를 갈아 넣지 않고 일하는 법’을 모른다. 아마 평생 이렇게 살 거 같다. 하지만 내 한계를 인정하고 일을 마무리 짓는 법은 이제 조금 알 거 같다. 내 부족함을 인정할 용기, 부족한 나를 미워하지 않을 용기, 내 노력을 인정해 줄 용기도 조금 생긴 거 같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워. 나를 너그러이 받아 줘서 고마워. 내년에도 나를 잘 부탁해. (2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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