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정산 2025_배움 운

by 경이


주치의 선생님이 물었다.

“학교 다닌 거 후회하세요?”

“아니요. 너무 화가 나서 자퇴하려고 마음먹은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좋았어요. 학교에 안 갔다면……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상상이 안 돼요.”

.

오랜만에 친구와 연락했다. “벌써 학기가 다 끝났다”고, “2월에 졸업한다”고 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진짜? 입학 직전까지 갈지 말지 그렇게 고민하더니, 하하!”

.

편집 디자인은 지난해 여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처음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아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못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부족함 많은 내 작업물이 썩 마음에 들었다(지금 다시 꺼내 보면 자꾸 눈을 피하게 되지만). 강사님이 말했다. “디자인을 재미있어 하는 게 보인다. 작업물만 봐도 안다”고. 칭찬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학원 과정이 끝나고, 혼자 작업을 계속했다. 뭘 만들면 만들 수는 있겠는데, 한계가 느껴졌다. 기본이 부족한 게 여실히 보였다. 그러던 중 지금의 학교를 알게 됐다. 편집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과에서 마침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커리큘럼상 학원에서 배운 것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게, 배우고 싶은 게 더 많았다. 어차피 학원에서 배운 것도 가물가물했다. 처음 배우다 보니 따라가기 급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

옆 돌기를 하면서 보아도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교수진이나 수학 기간, 학비, 식비 등등 온갖 조건이 나에게 딱 맞아떨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입학 전날까지 입학을 고민했다. ‘내가 뭘 더 배워도 되는 때인가?’ 당장의 실력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망설여졌다. 나에게 1년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

나는 올해 초 학교에 입학해, 얼마 전 배움 과정을 ‘완수’했다. 학교에서 보낸 시간은, 입학 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면서 즐거웠고,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나의 실력은 지난해에 비해 아주, 아주아주 나아졌다. 작업물의 깊이가 달라진 게 확연히 보인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화나는 때도, 슬플 때도 있었다. 옆자리 친구가 자퇴했을 때는 많이 울었다. 내가 낯설었다. 나 원래 사람 별로 안 좋아하는데. 혼자 있는 거 좋아하는데. 주치의 선생님께 말하니,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기회라 생각하면 된단다. 그제야 알았다. 나도 사람들이랑 있는 걸 좋아하는구나. 나도 외로움을 느끼는구나.

각 수업이 종강할 때마다, 교수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마다 서운함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나는 헤어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이 사람들을 정말, 많이 좋아했구나. 다시 한번 나의 낯선 모습을 마주했고, 그 낯설음이 싫지 않았다.

.

나는 올해 유독 배움 운이 좋았다. 배움을 통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사람들 덕분에 많이 웃고 많이 성장했다. ‘매일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도 좋았다(좀 멀기는 했지만). 어딘가 소속돼 있는 신분에 답답하고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안정감이 더 컸다.

학기를 모두 끝마친 지금 나는 다시 혼자가 됐고, 외롭고 불안하다. 아직은 견딜 만하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계속 혼자 지냈다면 외로움과 불안을 지금처럼 견딜 수 있었을까? 중간에 과정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나는 뭘 하고 있을까?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완주했다. 아주 ‘온당’한 선택으로 배움의 운을 충만히 누린 한 해였다. (25. 12. 16.)

매거진의 이전글❒ 연말정산 2025_탄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