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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Dec 06. 2023

군인의 본분, 영화의 본분

영화 '서울의 봄(2023, 12.12:THE DAY)' 감상평

0. 결론


쓰다 보니 길어졌다. 그러니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이 영화의 작품성이 뛰어난지는 모르겠고 해외 관객들이 얼마나 좋아할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라면 당장 극장에 가라. 무조건 후회하지 않는다.



1. 들어가며


보고 싶기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했다는 것, 전두환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경험이 되리라 예상했다. 먼저 본 사람들의 평도 그랬다. 보는 내내 화가 났다고 했다. 그래도 재미있다고, 2시간 20분이 20분처럼 지나갔다는 사람도 있었다. 관람객 평이 좋으니 보고 싶기는 했지만 어쩐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12.12. 가 어떤 일이었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아는 것을 보러 갈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전두환이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점, 그것 때문에 열불이 나서 보고 싶지 않았다.



2. 역사가 스포일러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하고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마 그로부터 2시간 10분 동안 10분에 한 번씩은 한숨을 쉰 것 같다. 그것도 몸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장탄식. 이 영화의 끝을 너도 나도 알지 않나. 그렇다 보니 더욱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쿵쿵 뛴다. 화가 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마 한국 관객만이 느끼는 지점이리라. 고증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김성수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전두광(황정민 분)의 캐릭터를 정말 잘 고증했다. 전두환의 리더 기질과 소영웅주의를 잘 보여주는 말뽄새와 행동. 하나회가 군대 내부에서 조직폭력배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까지, 영화는 그때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각본과 연출이 대단한 지점은 이거다. 어차피 끝을 알고 있음에도 관객을 계속 보게 만드는 것.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빠져들게 만드는 것. 왜냐. 우리가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은 알지만 그 과정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3. 우리는 12.12. 를 전혀 몰랐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12.12. 를 전혀 몰랐다. 제대로 된 증언도 남아 있지 않고, 매스컴에서도 제대로 비춰주지 않았다. 전두환이 이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일까. 전두환 일파, 소위 '신군부'는 이때의 일을 모두 함구했다고 하는데, 그 신군부 사람들이 지금도 권력을 누리고 있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 나도 영화를 보면서 중간중간 놀랐다. 이토록 한심했다니. 전두환과 그 하나회 일파들이 이토록 무능한 집단이었다니. 그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여기저기 전화를 뿌리는, 그저 같은 하나회 식구라는 이유 하나로 똘똘 뭉친 '조직폭력배'와 다를 게 없는 집단이었다니. 이렇게 무능한 집단에게 국가 권력이 빼앗기다니. 여러 가지로 놀라운 모습에 장탄식이 나왔다.



4. 무능의 기원


그렇다면 이 무능은 무엇인가. '군인이 군인답지 못하다'는 것이 무능의 실체다. 군인답지 못한 군인들은 어디서 나왔는가. 국가 안보를 걱정하지 않는 군인. 적과 싸울 태세를 갖추지 않는 군인들이 왜 이렇게 군의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박정희의 잘못이다. 박정희는 스스로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자이므로, 군대 장악을 누구보다도 중요시했다. 군대 내에서 자신의 친위대가 필요했고, 그것이 '하나회'다. 박정희가 급작스럽게 죽은 그 시점에,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이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보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국방부장관 오국상(김의성 분)이 그렇게 무능하고 보신만을 생각하는 자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5. 이것은 설전舌戰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안다. 군인들이 나오고 군사반란을 다루고 총격씬이 나오는 영화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말로 하는 전쟁, 설전舌戰에 관한 영화다. 그렇기에 대사량이 많고, 개별 인물들의 연기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연기를 못 하는 배우는 없었다. 모두가 알 만한 주, 조연급 배우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렇게 짧게 나올 만큼 비중이 작은 배우가 아닌데, 싶은 배우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이들은 어떤 말로 싸울까. 전두광 쪽은 '우리는 같은 편이다. 내가 권력을 잡으면 너에게도 후하게 보상해 주겠다'는 말을 여기저기 흩뿌린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취지는 같다. 이에 대항하는 이태신(정우성 분) 쪽은 '군인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저들은 상관을 납치한 반란군이다. 진압해야 한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부분의 군인들이 자신의 본분보다 권력의 뒷줄에 서는 것을 택한다. 


나는 이 대립이 학연주의, 지연주의와 대립하는 원칙주의의 싸움으로도 보였다.



6. 영화의 미덕


이 영화의 미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이야기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건. 그것도 시작과 끝을 아는 사건임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 '모두 아는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행의 큰 요소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이 영화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전두광 일당이 국가 권력을 찬탈하는 그 9시간 와중에, 정말 미미하나마 군인 정신을 지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친 참 군인들이 있었다는 것. 영화는 그들이 죽을 때마다 굳이 자막을 붙이는 방식으로 그들을 추모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들 덕분에, 훗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선 뒤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고. 그들의 죽음이 곧 전두환, 노태우가 유죄라는 점에 대한 중요한 증거였던 것이다. 단순히 직업인으로서, 군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 덕분에 역사가 그들과 전두환, 노태우를 제대로 구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미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두환에 대한 악감정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군사 쿠데타라는 것 자체가 동서고금에 있었던 일이 아닌가. 멀고 오래된 것으로는 로마의 카이사르부터 (동)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들, 고려의 무신정권까지 군인들이 그 힘을 가지고 정권을 빼앗은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보편성이 있다.



7. 군인 정신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군인정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는 직업정신이라고도 할 것인데,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군인들이므로, 군인정신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전두광의 반란군과 이태신의 진압군으로 나뉘는데, 반란군이 이길 수밖에 없겠다 싶은 지점이 있다. 당시는 북한과의 경제력 및 군사력이 대등하던 시절이다. 기본적으로 군인이라면 북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군사력의 대부분은 전방에 있건만, 진압군은 북침을 염려해 병력들을 서울로 차출할 수 없다. 하지만 반란군은 여기서 지면 목숨을 잃는다. 게다가 권력욕의 화신인 전두광이 북침 따위를 걱정할 리가 없었다.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서울로 출동시킨다. 이 지점에서 반란군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군인정신 없는 자들이 군인정신 있는 군인을 이길 수밖에 없는 역설. 그 지점이 참 한숨이 나오면서도 연출에 감탄했던 부분이다.



8. 군대 문화에 대해


나는 일반병으로서 군대를 다녀왔다. 군대를 다녀오니 사회 여기저기에 '군대문화'가 참 많다고 느꼈는데, 돌이켜보니 그것은 모두 군부독재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를 보니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악폐습이 12.12. 군사반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면 알겠지만 군인정신없는 장교와 부사관이 얼마나 많은가. 그로부터 배운 선임 병사들은 오죽했던가. 영화를 보면서 나온 장탄식의 대부분은 그런 것이었다. 


저런 자들이 국가 관력을 장악했으니, 후배 군인들이 뭘 배웠겠나. 그 후배의 후배들이 만든 군대는 얼마나 괴로운 것이겠나. 그런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자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9. 80년 광주에 대한 위로 (*약간의 스포일러*)


어쩌면 이 영화는 군홧발에 짓밟힌 80년 광주에 대한 헌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절정 부분. 이태신이 100여 명 남짓한 부하들을 모아놓고 외칠 때, 어쩌면 이들이 군인의 본분을 지키는 마지막 군인들이 아닌가 싶었다. 이들이 패배하고(나중에는 대부분 강제전역 당했다고), 전두광 일당이 득세한 끝에, 결국은 신군부의 군홧발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지 않았나. 그 프리퀄을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영화의 많은 살육 장면은 공수부대가 제공하는데, (심지어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제3공수부대는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다) 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의 살육 장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10. 영화의 본분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한참 동안 인터넷에서 12.12. 군사반란을 뒤졌다. 영화는 이래야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와도 같은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 나(관객)의 생각이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책을 보는 이유와도 같다. 카프카가 '책은 도끼다'라고 말했듯이, 모름지기 책이라면 그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달라야 한다. 우리의 꽁꽁 얼어붙은 생각을 도끼로 내려쳐 깨버리는 것이 책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기 전의 나와 본 후의 내 생각 또는 가치관이 같다면, 영화를 보는 보람이 없다.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기존의 내 생각에 의문을 가질 만한 영화, 조금이라도 달라질 만한 영화가 '의미 있는 영화'이고, '영화의 본분'을 지킨 영화라고 본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본분을 다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12.12. 군사반란이 어떻게 나쁜지, 얼마나 나쁜지,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을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지, 얼마나 직업정신없는 자들이 그 직업과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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