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을 배신하고 성공한 화가의 결말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by 라희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된 <인상주의부터 모더니즘까지> 라는 전시가 아주 핫했습니다! 전시작 중 가장 화제를 모았던 건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 유명한 작품 <피아노 앞의 소녀들> 였지요.


피아노 앞의 두 소녀, 오귀스트 르누아르, 1892, oil on canvas


이 그림은 르누아르의 대표작으로, 세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그 중 한점이 뉴욕 MET에 있는데,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오게 되었던거에요.


그런데 이 작품을 과연 우리는 '인상주의' 라고 봐야할까요?

정작 화가가 인상주의를 배신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주류에 끼지 못한 자들의 반란


19세기 프랑스 미술계는 살롱이라는 국가 공모전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 당선되지 못하면 화가로서 명함도 못 내밀고 그림을 한 점도 팔 수 없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살롱은 아주 보수적이기도 했어요. 신화 속 이야기나 역사적인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그린 그림만 인정해줬거든요.


이에 반발한 젊은 화가들, 모네, 르누아르, 카미유 등은 카페에 모여 매일 밤 기나긴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이들은 1874년, 보수적인 살롱문화에 대항해 자기들만의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전설적인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의 시작이랍니다.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 인상파


그렇게 인상주의는 야심차게 문을 열었지만 반응은 처참했습니다. 평론가들은 “그림이 완성되긴 한거냐“ ”벽지보다 못하다“ 며 독설을 퍼붓기 일쑤였지요. '인상주의'라는 이름조차, 당시 모네가 그린 <인상, 해돋이> 를 비꼬며 나온 말이었거든요.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물론 이상적으로는 이런 멸시를 이겨내고 패기넘치게 끝까지 대항했으면 좋았을거에요. 하지만 당시 르누아르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모네와 함께 며칠 동안 빵 한 조각으로 버티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요. 물론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처지도 비슷했지만, 한 가지 다른점이라면 르누아르는 뼛속부터 가난했다는거에요.


<르누아르의 초상> 1876


드가, 바지유, 모네 같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은 지금당장은 돈이 없을지언정 집안 자체는 부유했습니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가난한 양복집 아들로 태어나 어릴때부터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가난' 이라는 무게가 동료들에 비해 더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지요. 2회, 3회.. 인상주의를 내건 전시가 거듭되어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르누아르는 결단을 내립니다.



예술도 좋지만 일단은 먹고살아야한다!


<라 그르누예르의 수영객들> 1869,




그동안 즐거웠고 난 이만..


결국 1878년, 제 4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앞두고 르누아르는 동료들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자신은 인상주의 전시 대신 파리 살롱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한거에요.


당시 르누아르는 인상파의 대장격(?)인 존재였기에 동료들은 더욱 충격이 컸어요. 이때, 에드가 드가는 르누아르를 향해 "돈을 위해 영혼을 판 놈" 이라며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지요.


오귀스트 르누아르 <배우 잔느 사마리의 초상> 1877


이때 르누아르는 아주 현실적인 말을 남깁니다."파리에는 그림을 사는 사람이 15명뿐인데, 살롱을 거치지 않으면 그들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다" 라고요. 어찌보면 인상파 화가 중 유일하게 현실감각을 가졌던 사람이었을지도..?!





화려한 배신의 결말


이렇게 동료들을 버리고 홀로 주류 미술계로 돌아간 르누아르는 어떻게 됐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 을 터트렸습니다.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너도나도 그림그려달라고 르누아르 앞에 줄을 섰거든요!


오귀스트 르누아르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1878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바로 부유한 귀족 부인 샤르팡티에와 아이들의 초상화였습니다. 그림을 받아보고 너무나 만족한 샤르팡티에 부인이 르누아르를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면서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지요. 어찌보면 르누아르 인생의 귀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사실 우연히 얻어걸린 건 아니었고요, 일종의 '전략' 이었습니다. 아까 르누아르가 인상파를 떠나며 한 말, 기억하시나요? 파리에는 그림을 사는 사람이 15명밖에 없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요! 르누아르는 의도적(?)으로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샤르팡티에 부인에게 접근했던거에요. 그리고 그의 전략은 아주 성공적이었죠.




자수성가의 아이콘이 된 르누아르


이 후 르누아르는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그야말로 돈을 싹싹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호화롭게 살다 가셨지요(..!) 가난한 양복집 아들이 자기 힘으로 인생역전을 한거에요!


오귀스트 르누아르 <테라스의 두 자매> 1881


하지만 그는 이렇게 성공한 후에도, 힘든 시기를 함께 했던 인상파 동료들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남몰래 지원해줬다고 해요.


또,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모네에게는 "너도 인상주의 그만하고 살롱전으로 돌아가~" 라며 회유(?)를 했다고도 하죠. 당시 힘들었던 모네는 실제로 살롱전에 나가기도 했으나, 르누아르처럼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모네는 미국에서 성공했죠!)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든 여인> 1875


한 가지 재미있는 반전은, 유독 르누아르를 거세게 깠던 에드가 드가의 집에서 르누아르의 작품 여러점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에요. 혁명을 포기하고 속세(?)로 돌아간 동료를 비난하긴 했지만, 사실 그의 그림은 남몰래 인정하고 있었나봅니다.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피아노 앞의 두 소녀> 는 르누아르의 말년작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명성이 쌓인 그에게, 프랑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의뢰한 작품이었지요. 아마도 르누아르는 이 점을 굉장히 영예롭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완벽하게 그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 가지 버전이나 그렸거든요. 이 세 점은 각각 오르세, 오랑주리, MET 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피아노 앞의 두 소녀, 오귀스트 르누아르, 1892, oil on canvas


말년의 르누아르는 심한 관절염으로 손이 굽었지만, 붓을 손에 묶으면서까지 끝까지 그림을 놓지 않았습니다. "통증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는 감동적인 말과,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기고 떠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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