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어떻게 생겨먹었나

by 교양이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자살에 관한 것이다.”

- 알베르 카뮈 -



어릴 적 내가 사는 동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이 일어난 적이 있다. 어른들은 아내를 먼저 보낸 할아버지가 외로워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수군거렸다. 화단에는 시체를 가린 누런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다. 핏자국을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지만 나는 좁은 틈 사이로 삐져나온 푸르뎅뎅한 발을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람은 왜 자살할까? 물론 사람만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도 자살을 한다. 나와 지능이 비슷한 돌고래는 일부러 해안가로 올라와 질식해 죽는다고 한다. 물개나 바다표범, 범고래도 육지로 올라와 말라죽는 스트랜딩(Stranding) 현상을 보인다. 바다 생명체만 그런 건 아니다. 피피라는 침팬지는 어미를 잃고 우울증을 앓다가 한 달 만에 죽었다. 동물학자인 어니스트 톰슨 시튼의 『시튼동물기』에 따르면, 회색곰 와이브는 자신이 늙고 병든 것을 깨닫자 유황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가 잠들었다고 한다. 늑대 로보는 사람에게 잡힌 것을 깨닫고는 굶어 죽는 쪽을 택했다. 이렇듯 야생에 사는 동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자살한다. 자살은 인류 역사 이래로 꾸준히 존재해 왔으며, 인종,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자살은 지위나 재산과도 관련이 없다. 돈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듯이, 돈과 자살의 관계도 비례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자나 빈자나 목숨값만큼은 평등한 셈이다. 자살이 유일하게 남기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다. 자살한 사람은 떠났지만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는 영원히 남아 영감에 목마른 문학가나 예술가들의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왔다.


철학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의미를 찾는 일은 철학자들의 전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철학자들은 그런 시시한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라면 삼겹살이 주는 의미는 보편적이지 않다고 반박할 것이다. 대신 철학자들은 왜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썼고, 그 답이 '삶의 의미'라고 답을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철학할 이유도 없어지는 거니까. 결국 철학자들은 반강제적으로 살아야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 두고 그게 무엇인지 답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한 가지, 자살이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어떻게든 자살하지 않을 의미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자살할 의미를 찾으려 애쓴 철학자도 있다. 바로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는 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은지 사람들을 납득시키려 최선을 다했고, 자신을 제외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시켰다. 정작 본인은 자살 충동에 시달리면서도 강박적으로 건강을 챙기고 재테크에도 최선을 다했다. 말년에는 남몰래 유명세를 즐기기도 했다. 그때쯤에는 괴팍하고 늙은 철학자도 왜 삼겹살만으로 살아갈 이유가 되는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자살에 관해 인간과 동물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 인간만이 자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엄격한 신앙인이라면, 자살하는 것은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거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라면,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고통에 맞서지 못할 만큼 나약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알프스 언덕에 빨간 집을 짓고 사는 스위스 사람이라면,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끓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발명해 낸 자살 캡슐을 적극 권장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초콜릿을 건네거나.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사회학자들은 자살이라는 주제를 자신들의 밥그릇 영역으로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그제야 자살이라는 주제는 슬픔과 비난이 공존하는 개인의 영역에서 객관적인 관찰의 영역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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