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사회학자라면 에밀 뒤르켐을 꼽을 수 있다. 뒤르켐은 『자살론』을 통해 자살의 원인이 정신질환이나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뒤르켐에 따르면, 자살은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을 묶어주는 사회적 연결의 힘이 약해지면 자살률이 늘어난다. 종교와 가족, 정치는 사회 통합의 매개 채다. 개인주의는 고립을 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유를 감당하기 힘들 때 자살한다. 그러므로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며, 사회 집단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뒤르켐은 개인과 사회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한 번쯤 자살을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라면 국물을 거실에 쏟았을 때 살기 싫어진 적이 있다. 물론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라면 국물이야 닦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라면냄비를 엎은 일이 자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끔 하는 트리거(Trigger)가 될 수도 있다. 라면이 쏟아진 건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난장판이 된 바닥을 닦을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건 삶의 고난에 마주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는 라면 국물조차 삶의 의미를 다시 되묻게 하는 실존적 계기가 된다. 실제로, 심한 우울증을 겪는 환자들은 잘 참아내다가도 아주 사소한 일로 무너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삶의 의미를 구태여 찾아내려 한다. 그러고는 곧 답을 찾아낸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듯이,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불행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희망 때문이다. 사실 희망은 환상이다. 더 좋은 미래가 찾아올 거라는, 어쩌면 아무 근거가 없는 낙관적 환상 또는 망상. 그게 바로 희망의 실체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면 고통을 견딜 이유도 없으며, 삶을 계속해나갈 이유도 없다. 그러니 희망은 계속 허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우리가 생의 고통을 견디며 꾸역꾸역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객관적으로 따져본다고 상상해 보자. 생각보다 "살아야 할 이유 리스트"에 10줄도 채우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단 한 가지뿐이다.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것이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변태적인 욕구를 가진 이상성욕자들, 혹은 프로틴과 헬스에 미쳐버린 근육쟁이들. 잠깐이라도 헬스장에서 깔짝거려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운동은 원래 고통스럽다는 걸. 그래서 헬창들은 운동이 주는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통을 즐기는 게 아니다. 140kg가 넘는 무게가 몸을 짓누르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인간은 없다. 그건 생명체의 대원칙,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려는 본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보다 무거운 봉을 들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데 아무 일도 없다면 그건 저주일 뿐이다. 결국 운동 중독자들도 근육을 키우려는 목표와 동기 때문에 고통을 즐길 수 있는 것뿐이다. 운동을 즐기게 되는 순간 역시, 단순히 몸이 좋아져서가 아니다. 운동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을 배울 때부터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 아니라 고통에 관한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말했듯이,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이겨내지 못한다. 이것이 자살에 관해 뒤르켐이 말하지 않았던,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숨은 고리다. 자살이 왜 사회적 현상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사회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일에 실패했거나, 혹은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의미다. 그런 사회가 과연 존재할까? 존재한다. 다행히도 멀리 찾을 필요는 없다. 바로 이 땅, 자살률 세계 1위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까.
다음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