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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밍의 다이빙

진보의 도덕

by 교양이



디즈니 영화『화이트 월더니스』를 보면, 레밍 무리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만화가 게리 라슨은 영화를 보고 레밍들이 줄지어 바다로 뛰어내리는 만화를 그렸다. 덕분에 레밍이 종의 번영을 위해 집단자살을 한다는 신화가 생겼다. 레밍 효과(Leming effect)'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재밌는 점은 혼자 튜브를 쓰고 있는 이기적인 레밍이 있다는 것이다.

나그네쥐라 부르는 레밍이 정말 인생을 나그네처럼 잠깐 살다 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레밍의 집단 자살은 사실 턴테이블 위에 쥐들을 올려놓고 떨어지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위치하는 레밍 무리는 3~4년마다 개체 수가 급감했다가 다시 100배 넘게 증가한다. 그 과정에서 새 서식지를 찾아 바다나 개울가를 횡단하는데, 거리를 잘못 계산한 선두 때문에 가끔 물에 빠져 죽을 때가 있다. 이런 습성 때문에 레밍족의 번영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한다는 착각이 생겨났다.


우리 역시 이타심과 연민을 레밍의 희생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생판 모르는 남을 돕는 것은 희생으로 간주된다. 한때 진화론자들에게 동물의 이타적인 행동은 수수께끼였는데, 기본적으로 동물이 이기적 본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혈연이 아닌 동료를 돕는 것에 오작동이나 부산물이라는 용어를 쓰며 유난을 떨었다. 유전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개체의 복잡성을 보지 못하는 편협한 생각에 갇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 동물도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타주의가 그다지 유별난 게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조건 없는 도움이 사실 아주 흔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 흡혈박쥐는 하루도 피를 빨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높은 이타주의와 협력성을 가지게 되었다. 운수 좋은 날에 잔뜩 피를 먹은 박쥐는 배를 곪는 동료에게 피를 토해 준다. 그럼 도움을 받은 박쥐도 다음에 똑같이 피를 나눠준다. 그렇게 흡혈박쥐들은 위험을 분산하고, 서로 도우며 의존하는 삶을 살아간다. 늑대와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나눠주고, 보노보처럼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걸 더 좋아한다.


남을 돕는 것은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다. 인류는 스스로를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협력하고 배려하는 모순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사회는 오직 경쟁과 탐욕만이 경제 성장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정심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순진한 것으로 치부된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들 역시 부탁하듯이 연민과 관용에 호소하는데, 결국 이타주의가 희생이라는 생각에 갇혀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착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사고실험을 해 보자. 어린아이가 한겨울에 속옷만 입고 길바닥에서 떨고 있다. 온몸은 시퍼런 멍으로 얼룩져 있다. 그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엔 연민과 슬픔, 분노가 치솟는 동시에 아이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앞선다. 보수나 진보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희생과 손실에 불과하다면, 측은지심이 부르는 것이 진화할 이유가 있을까? 이유 없이 진화하는 건 없다. 고통받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우리 뇌에선 조절이 불가능한 공감 스위치가 켜진다. 그럼 우리도 똑같이 심리적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도 고통의 전염성이 자연에 보편적인 것은, 그럴만한 생물학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이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동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돌보려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당당하게 어필해도 된다.


이제 이타주의가 희생이라는 생각은 버릴 때가 되었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우리의 DNA에는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가 나선 형태로 복잡하게 꼬여 있다. 공감과 배려심이 높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챙기고 보살핌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인간이 순하고 착한 늑대만 길러 골든 리트리버를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가축화시켰다. 이를 자기 가축화 가설(Human Self-Domestication Hypothesis)이라 한다. 당연히 이 이론의 아이디어는 보노보에게서 나왔다.


우리에겐 여전히 보노보의 피가 흐른다.






그럼 침팬지는 가만히 있었을까? 당연히 침팬지도 놀지 않았다. 루이트가 지도자였던 시절, 한참 이성에 호기심이 많던 청소년 니키가 자신의 달라진 물건을 암컷에게 드러내며 남성성을 과시한 적이 있었다. 근처에 있었던 루이트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돌을 집어 들고 니키에게 다가갔다. 자기 여자에게 들이댄 니키의 머리를 내려치기 위해서였다. 불안해진 니키는 서둘러 자신의 것을 평상시처럼 되돌렸다. 증거를 찾지 못한 루이트도 무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니키 또한 루이트가 쥔 돌을 킁킁대며 능청스러운 연기를 했다. 때려볼 테면 때려보라는 듯이 말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 억압에 대한 혐오는 유인원에게도 존재한다. 한 번은 우두머리 침팬지 지모가 허락 없이 짝짓기를 한 수컷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은 적이 있었다. 보다 못한 암컷 여럿이 우우 하고 항의의 시위를 했다. 그러자 지모는 불안한 웃음을 지으며 공격을 멈췄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알파 침팬지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동물 사회의 위계를 단순하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서열과 지위가 존재한다면, 그 위계를 견제하는 균형장치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엠은 우리에겐 태생적으로 지배받기를 싫어하는 반감이 있으며, 권력에 맞서는 전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험담, 조롱, 추방, 쿠데타,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여는 것들 말이다. 보엠은 이를 역지배 전략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 인권은 폭정에 맞서는 훌륭한 언어적 도구다. 3월 1일에 외친 독립선언서,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문, 영국의 권리장전 모두 인간에게 보편적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내용 또한 거의 비슷하다. 루소는 그전부터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불평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외치며 시민의 저항을 정당화했다. 동굴 벽화에는 화살 부대가 족장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을 처형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쿵족은 일부러 고기에 대한 모욕을 해 불평등이 생길 여지를 차단한다. 뛰어난 사냥꾼의 콧대를 꺾어 으스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이는 멋대로 침팬지를 불러들여 불평등이 자연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일부 보수주의자의 생각과 다른 결과다. 침팬지가 오명을 뒤집어쓴 건 덤이다. 사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수렵채집민들은 대개 평등하게 살아왔다. 인류학자들은 50만 년 전부터 화살과 창 등 사냥 무기가 늘어나며 평등주의가 확대되었을 거라고 보고 있다. 강한 신체적 이점이나 지배적인 태도가 날카로운 무기 앞에서 이점을 잃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언어도 있다. 침팬지는 사회적 눈치와 뛰어난 관찰능력으로 권력의 변동을 파악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활용한다. 험담과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며 착취적인 지도자의 평판을 깎아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대중의 여론을 살피고 눈치를 봐야만 했다.


평등주의 역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사람들에게 토큰을 주고 타인의 소득을 줄이거나 늘리게 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이 높은 금액을 할당받은 사람의 소득을 줄이고, 낮은 금액을 받은 사람의 소득을 올리는 데 토큰을 쓴다. 불평등을 혐오하는 심리가 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지위를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다. 불평등을 막지 않고 누구 하나만 꼭대기에 올라서면, 사회적 협력과 유대감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판바니샤라는 보노보 역시 자기만 우유와 건포도를 많이 받고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자, 특혜를 거부했다. 혼자 다른 방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판바니샤는 친구에게도 먹을 걸 나눠주라는 듯 다른 보노보를 가리켰고, 동료들이 보상을 받고 나서야 자기 몫을 먹었다. 이러한 결과적 평등을 2차적 공정성이라 한다. 1차적 공정성은 오이를 집어던지는 마카크원숭이처럼 부당한 자기 몫에 분노하는 것이지만, 2차적 공정성은 남보다 많이 받는 것에도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심리는 유인원에게만 있다. 그렇다면 진보주의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권위에 대한 저항심리, 불평등 혐오 같은 정치적 마음을 더 강하게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된다. 실험을 해 보면, 진보주의자는 배려와 공평성을 거부하는 문장을 접할 때 충격을 크게 받는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충성심과 권위를 무시하는 문장을 접할 때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평등과 연대를 최우선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평등에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만들어진, 시장의 힘으로 형성된 사회는 부를 생산해 낼 수는 있어도 삶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단합이나 신뢰를 이끌어내진 못한다. 가장 행복한 사회는 가장 부유한 국가가 아니다. 우유와 건포도를 함께 나눠 먹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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