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차이 이해하기
존 B. 칼훈이라는 동물학자가 있었다. 1968년, 그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악마 같은 실험을 계획했다. 인구가 증가하면 악과 불행이 인구를 감소시킨다는 맬서스의 아이디어를 쥐들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칼훈은 먹이와 물은 무한정 공급하되, 쥐들을 가로 세로 210cm의 좁은 공간에 가두어 번식시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처음 암수 한 쌍으로 시작한 쥐들은 곧 활발히 번식했지만, 최소한의 공간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자 이내 서로를 죽이거나 잡아먹었다. 수컷 쥐들은 짝짓기에 관심을 잃었고, 암컷 쥐들도 새끼를 돌보지 않았다. 이후 600일째에 개체 수가 정점에 달한 후엔 꾸준히 줄어들었다. 결국 감옥의 모든 쥐가 멸종했다. 이 실험이 유명해지면서 지구의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사회 다윈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칼훈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세계에서 인구 밀집이 가장 심하고 출산율도 가장 낮은 국가기 때문이다. 그 점을 눈치챘는지, 언론과 학자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과도한 경쟁이 벌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의 예로 우리나라를 꼽았다. 그들은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다 같이 공멸할 거라 말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쥐들은 쥐고, 인간은 인간이다. 우리는 대도시에 살지만 옆집 사람을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는다. 영장류나 유인원도 마찬가지다.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은, 서로 부대끼며 지내는 만큼 사회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도 뛰어나다. 이미 영장류를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베르베트원숭이를 좁은 공간에 몰아넣었지만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옴짝달싹 않는 등 관심을 덜 기울여 다툼이 발생할 소지를 없애려는 행동만 늘었다.
겨울 동안 좁은 실내 사육장에서 지내는 침팬지 무리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공간이 줄어들면 인사와 포옹 같은 화해가 늘어나고, 공격성에 비례해 긴장을 누그러트리려는 욕구도 함께 커진다. 침팬지는 지배적인 동물인 만큼 화해도 잘한다. 한 번은 싸움이 크게 번지자, 아른헴의 모든 침팬지들이 모두 한꺼번에 우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 수컷은 우리 한쪽에 놓여 있던 쇠북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에 싸운 수컷과 암컷이 입을 맞추고 껴안으며 화해를 시작했다.
다툼보다 중요한 것은 화해다. 폭력과 증오는 화해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의견이 평행선을 그릴 때, 불만과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화해의 시작이 된다. 공개적으로 이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면 관계는 의심을 받고, 서로의 의도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럼 관계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루이트의 비극처럼 말이다.
그럼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까? 화해가 항복의 동의어로 간주되면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에게 복종을 요구하면 갈등은 봉합되지 않는다. 그럴 땐 신체 접촉이 가장 좋다. 어머니로부터 포근하게 안겨 위안을 얻던, 유년 시절의 따스한 기억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 시작은 손 내밀기가 좋겠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화해를 할 때 고음의 우후, 우후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인 채 악수를 바라는 것처럼 한 손을 내민다. 악수는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하기에 서로의 체면을 지켜준다. 묵은 앙심을 완전히 풀진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공격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악수는 복종 행동과 관련이 있지만 동시에 유대와 친밀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또한 너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너그러움과 역지사지의 의미다. 유인원은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기에, 일단 마음의 문을 열면 쉽게 화해할 수 있는 물꼬가 트인다.
하지만 사과의 말을 꺼내는 게 먼저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잘못한 점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지 않으면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세계관, 즉 프레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 프레임을 결정하는 게 바로 인지거리다.
인지거리란 내가 유의미하게 경험하는 인식의 거리이자, 내가 실제로 삶에서 신경 쓰는 세상의 전부다. 70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모든 일이 내게 와닿을 리 없다. 우리 뇌는 고성능 필터를 가지고 있다. 정보는 범주화를 거쳐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무시할 것으로 분류된다. 의식에 도달하는 정보의 종류와 무게는 정해져 있다. 우리는 그중 아주 일부만을 받아들여 판단하고 고려하는 대상에 포함시킨다. 초등학생 때 자꾸 걷다 보면 세상 사람들을 전부 만나고 돌아올 것이라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이제는 그전에 굶주린 그리즐리 베어의 점심이 되거나 콩고 반군의 마체테에 의해 목이 베일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결국 내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세상의 크기는 어쩔 수 없이 한계를 가진다.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상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디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지구 반대편에서 규모 9.0의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집을 잃었다는 뉴스를 보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안타깝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손톱 옆에 갈라진 살이 더 신경 쓰인다. 복지나 인권, 성소수자, 사형제도, 최저임금,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중요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인식 범위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만약 인지하는 세상이 더 넓다면? 신경 쓰고 고려하는 범주가 멀리까지 늘어난다. 반대로 세상의 크기가 좁으면 무시해도 되는 대상이 늘어난다. 물론 내가 인식하는 세상의 크기는 타고난 요인과 환경적 요인 모두에 영향을 받는다. 정치는 선천적으로 다른 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보수와 진보가 환경적인 요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의 인지거리는 후천적으로도 좁아지거나 넓어질 수 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는 어느 정도까지 타고난 ‘무의식적인 인지거리’가 다르고, 그 인지거리에 걸맞은 삶을 살고 또 그에 걸맞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인지거리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보수와 진보가 왜 다른 세계관과 신념을 가지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끌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보수는 무의식적 인지거리가 짧아 세상을 좁게 보고, 진보는 인지거리가 길어 세상을 넓게 본다. 보수는 관심을 가지거나 신경 쓰는 범위가 좁아 자신과 자신의 가족, 국가, 이해집단 같이 좁은 범위까지만 신경을 쓰고 그 외 세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 반면 진보는 가족, 국가를 넘어서서 인류, 동물, 환경 같이 넓은 추상적 범위까지 관심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인식체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프레임에 따라 정보를 재해석해 받아들이는 걸 '동기화된 추론'이라고 한다.
인지거리가 달라지면 보고 느끼는 세상이 달라진다. 결국 진보가 보수를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보수가 진보를 ‘위선자’라고 흉보는 계기가 된다. 인지거리가 긴 진보주의자에겐 사회 전체, 특히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것이 당연한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 신경 쓰는 보수가 이상하게 보인다. 반대로 인지거리가 짧은 보수는 나와 내 주변까지만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 너머에 있는 인권이나 평등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기 이익을 양보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진보가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회 운동을 하는 모습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 강남 좌파 같은 말을 만들어 낸다. 사실 본인들이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니(인지적 당연함 때문에), 남들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지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은 어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에 기반한 진보의 정치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김치찌개, 돈가스, 제육볶음의 공통점이 뭘까? 모두 직장인이 좋아하는 점심 메뉴다. 삼겹살과 치킨은? 회식 메뉴다. 그럼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먹는다는 행위다. 돈가스와 치킨, 삼겹살은 '먹는다'는 본질 앞에서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김치찌개나 제육처럼 좁은 범위의 현상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왜 김치찌개를 안 먹고 파스타를 먹냐고 화를 내는 일이 일어난다.
이렇듯 피상적인 현상, 눈에 보이는 것 그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부차적인 문제에 매몰된다. 인지거리가 짧으니 좀 더 넓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도 이런 방식으로 달라진다.
보수와 진보도 그렇다. 보수는 짧은 인지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 범위 내의 세상에서만 살아가려 한다. 보수주의자는 인지적으로 당연한 경계 그 너머로 발을 디딜 의지가 없다. 그래서 경계 밖의 정보는 자신의 인지 범위 내에 맞도록 재해석하여 받아들인다. 결국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 같은 인지적 오류가 진보주의자들보다 빈번하게 일어나, 하나의 독단적 신념(Dogma)을 형성한다. 진보주의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면, 자기 세상에선 그게 당연하지 않으니 불쾌한 감정이 들고,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포퓰리즘, 위선자라고 믿는 식이다.
보수주의자는 대개 인지거리 영역 밖의 요인들이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이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걸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 귀인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개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인식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 맞춰져 있으니,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런 거고, 안 되면 남 탓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인지거리가 짧으면, 그 범위 내의 대상들에 대해 더 공감하고, 더 애정을 가지게 된다. 이를 바꿔 생각해 보면, 인지거리 내의 대상에 더 집착하거나 맹신한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투입할 수 있는 감정과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범위가 좁아지면 인지거리 내 대상에 대한 공감과 인식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더 세진다. 보수주의자들이 남의 자식에는 냉정해도 자기 자식에는 죽고 못 살거나, 경쟁 국가에는 적대적인 동시에 애국심이 넘치는 것도 좁은 인지거리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의 이타심이 '우리 대 그들'의 지역주의적 성격을 띠는 이유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는 넓은 인지거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보수주의자가 세상을 좁게 보는 대신에 선명하게 본다면, 진보주의자는 세상을 넓게 보는 대신에 흐릿하게 본다. 그래서 각각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진보주의자가 추상적이고 난해한 언어를 사용하고, 다소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진보주의자들도 이렇게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언어를 자주 쓴다.
‘주체와 객체, 타자와 대타자, 개별성과 전체성’
조건 없이 난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잖아요’
물론 인지거리가 넓으면 장점이 많다. 다양한 현상들의 관계와 본질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다방면에서 정보와 관점을 고려해 종합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가 자기 장점을 발휘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넓은 인지거리에 걸맞은 깊이를 가지려면 고도의 지적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부하는 자세지만, 그건 머리 아픈 일이다. 그래서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모호하고 흐릿한 앎에 안주하고, 지적 게으름에 굴복한다. 이러한 지적 게으름을 만족시켜 주는 게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는 ‘idea’와 ‘logik’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대한 인식 체계 또는 신념 체계를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해석하는 틀,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물론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와 진보주의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그 성격은 많이 다르다. 보수의 이념은 이익 추구와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진보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욕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둘 다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시작되는 것들이다.
진보주의자가 이데올로기에 더 이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주의자에겐 이미 사회적 관습과 예절, 종교, 국가, 돈, 소속 집단 같이 안정과 소속감을 충족시켜 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진보는 사회적 관습과 전통 너머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들에겐 지나치게 넓은 인지거리를 이해시켜 주는 지성적 틀이 필요하다. 덕분에 진보의 언어는 항상 현실에 발을 단단하게 디디지 못하고, 관념의 안갯속에 둥둥 떠다니게 된다. 진보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