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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Feb 03. 2021

여자라서, 많은 날들의 공통분모

발령을 앞두고 선배는 말했다. 

"인사 나고 초반에 아프지 않게 조심해야 해. 여자라서 아프다는 말 나올 테니까"

그렇게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여자라서'라는 이유는 그날을 시작으로 꽤 많은 날들에 이유가 됐다. 


보통 기자들은 인사발령이 나면 많은 것들이 바뀐다. 일반 회사처럼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책상을 옮기는 게 끝이 아니다. 회사 내에서 자리가 바뀌는 건 물론이고 근무지인 출입처가 바뀐다. 출입처가 바뀐다는 건 출근지가 바뀌고, 내 통근 시간이 달라지며, 같이 밥을 먹던 동료들이 달라지고, 내 휴대폰에 자주 떠있는 취재원들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새로운 조직에 입사하는 것과 같다. 


환경이 달라지면 사람들은 누구나 아플 수 있다. 긴장하고 적응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니까. 특히 그때 인사발령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9월 30일 자, 그러니까 제법 완연한 가을, 공기가 꽤나 서늘해질 때였다. 여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감기 걸리기 쉬운 시기. 


"여자애들은 이래서 안돼. 오자마자 아프다고 말이야" 


선배는 아마 본인이 들었던 이 말이 그렇게 서러웠나 보다. 그러니까 새 출발을 앞두는 내게 그만큼 가장 먼저 신신당부했겠지. 다행히도 나는 인사발령이 나고 첫 주에 아프지 않았다. 둘째 주도 아프지 않았다. 제법 잘 적응하는 듯했으며, 정신없는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딱 한 달을 버티고 엄청 아팠다. 아마 내 몸은 멀쩡하게 한 달을 아프지 않고 버텨냈다는 걸 주인님이 좀 알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아프기 시작하고 나서야 선배가 했던 말에 제대로 공감할 수 있었다. '여자라서'를 이유로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발령 일주일 뒤에 아프든 한 달 뒤에 아프든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언제든 내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나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자애들은...'으로 시작했겠지. 괜히 이런 이유로 내 커리어에 흠집을 내기 싫었던 나는 그때만큼은 자존심을 세웠던 것 같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했고 정말 너무 아프다 싶을 때는 화장실이나 눈에 띄지 않는 휴게실에 가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알게 된 아주 슬픈 사실인데 여자 화장실은 정말 고군분투의 공간이었다. 임신을 한 기자들이 버티고 버티다가 그나마 솔직하게 속을 게워낼 수 있는 공간, 약을 사러 나갈 힘도 없어서 '선배 생리통 약 있어요?'를 묻는 공간, 표정만 봐도 '너도 아파? 나도 아픈데'가 느껴지는 그런 공간. 어떻게든 아픈 걸 들키기 싫어 택한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위로를 얻었다. 


'여자라서' 이 말 듣기 싫어서 너도 여기 왔구나?





하루하루 직장 생활을 할수록, 더 많이 느껴졌다. 여자라서 안 되는 것들, 여자라서 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시선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지워야 한다는 걸 나도 모르게 깨우쳤다. 그래 그건 어느 한순간 깨달은 게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 시간이 누적되어 나도 모르게 깨우친 거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라서'라는 말 뒤에는 당위성도 따라왔다. 여자라서 아픈 것도 마음 편히 못 아픈데 '여자라서' 해야 하는 일까지 있다니. 정말 세상 피곤하지. 여자라서 화장을 꼼꼼히 해야 했으며, 협찬 의상은 항상 달라붙는 원피스에 재킷이었다. 방송할 때는 항상 머리를 풀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고 실제로 머리를 묶고 출연한 적이 손에 꼽는다.


그렇게 나의 직장 생활, 기자 생활 내내 따라다녔던 공통분모 '여자라서'라는 이유는 곧 내 목표를 만들어 준 한마디가 되었다. 가장 예쁘게 피어나고 있을 스물셋, 스물넷을 지나 스물다섯이 된 나의 머릿속에 '살아남고 싶다'라는 생각을 자리 잡게 해 줬으니. 분명 살아 있는데... 가장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시간을 살면서도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머지않아 다가올 유리천장이 보여서, '여자라서'라는 이유로 따라올 수많은 순간들이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듯해서.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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