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나서 하늘이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
그 시간에 하늘은 잠시 파란색이 된다.
아니, 하늘 아래 건물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파란빛이 된다.
온 세상이 잠시 파래지는 시간.
파란 시간이다.
전에 즐겨 듣던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 나온 말이다.
패널인 독실이가 자신은 이 파란 시간을 좋아한다며 소개해줬다.
그 후로 저녁 어스름에 한 번씩 파란 시간을 감상하곤 한다.
온 세상이 오묘한 파란빛에 싸이면
어떤 차분함과 신비함을 느낀다.
나도 좋아하는 하늘의 시간이 있다.
다홍 시간이다.
다홍 시간도 파란 시간처럼 매우 짧은 시간만 볼 수 있다.
노을이 질 때 하늘이 붉어지는데
다홍 시간은 붉은 하늘이 사라지기 직전, 잠깐 동안만 볼 수 있다.
붉은빛 태양은 저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에
다홍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타오른다기보다 어른거린다.
이때의 태양은 형광체로 바뀌어
그냥 다홍색이 아니라
형광빛 다홍색으로 어른거린다.
마치 활활 타오른 숯이
절정을 지나 결말에 다다르기 전
열을 충분히 머금은 채
내적 일렁임만으로 가만히 빛나는 것과 비슷하다.
이때의 태양은 항상 수줍다.
어딘가에 살짝의 모습을 감춘 채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고등학교 때 운동장 뒤로 넘어가는
다홍 시간의 태양을 자주 보곤 했는데
그 모습이 국어 시간에 어느 고전시에서 봤던
어여쁜 새색시의 수줍은 볼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아침에 다랑쉬오름에서 일출을 봤다.
보통 해질 때만 보던 다홍 시간을 또 마주했다.
나는 왜 찬란히 해가 떠오르는 시간보다
그 직전 다홍빛 머금은 시간이 좋은지 모르겠다.
일출 때 다홍빛 태양은 볼 수 없었지만
운 좋게 오늘은 그 빛을 한 구름이 받아
다홍색으로 밝게 빛났다.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하고
하늘에 떠있는 섬 모양을 하고 있던
다홍빛 구름에 한동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