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은 예기치 못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두루뭉술한 10개월 뒤에 태어났다. ‘곧 나오겠네요’라는 의사의 추상적인 예고가 있은 뒤에야 날카롭고 정확한 날짜와 시각, 3월 25일 1시 5분에 분만실에 등장했다. 어둡고 캄캄하던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기 하루 전날을 기억한다. 미지라 두렵기도 했고 끝이라 허망하기도 했다. 내가 엄마 배를 비집고 나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빛에서 쏟아지는 열기, 소리의 새된 진동, 끈적이는 감촉. 생경한 감각에서 오는 모든 통증은 내 예상을 넘은 것이었다.
탄생은 모든 이야기의 복선이다.
등나무 아래서 즐겁게 뛰어놀다 귀가 찢어진다. 여름 방학에 축구 교실에 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에게 낯을 가린다. 학교에 가기 싫어 배가 아프다고 생각했지만 맹장이 터진다. 은사님을 만난다. 취한 척한다. 일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가 노력한다고 다 되지는 않는 날을 맞이한다.
노래를 듣는다. 걱정 없이 매일 웃고 싶다는 내용이다. 신나는 멜로디와 절절한 가사의 대비가 극적이라 감동한다. 소설을 읽는다. 바다의 바위가 사막의 바위가 됐고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는 극을 쓴, 시한부 작가가 주인공이다. 바위의 대사가 마음 한편 어딘가로 와, 닿는다.
“그래요, 가세요. 가면 되잖아요. 당신은 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나와 당신이 이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있을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존재니까요.” -정용준 '바다를 보는 법'
어쩌면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매일 행복하고 싶다는, 행복을 예정하고 싶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꿀 수 없는, 탄생이 예기치 못했으며 삶을 주관하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며 사망 또한 부지불식간에 닥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닐지 숙고한다. 그렇다면 바위가 바다로 갈 수 있는 방법도 하나뿐일지도 모르겠다며 인정한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은 예기치 못한 일이다. 탄생과 인생이 그러했듯. 나는 그렇게 어영부영 85세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하는 의사의 추상적인 예견이 있은 뒤에야 예리하고 오차 없는 날짜와 시각, 12월 7일 3시 2분부터 서서히 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