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편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창문 밖으로 하늘하늘 눈송이가 날아다녔다. 이곳은 한국보다 덥고 습한 곳으로 아무리 겨울이라도 눈을 보기 힘든 곳인데 이렇게 내리는 눈을 보니 마음이 들떴다. 그렇지만 어제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다 보니 리온이는 감기에 걸렸다. 오늘은 특히나 아픈 모양이다. 창문 밖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 지면 막상 나가면 오돌오돌 떨릴 추위가 분명하다. 어딘가로 돌아다니며 리온이를 더 아프게 할 바에는 차라리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점심밥으로 둥베이 음식점에서 꿔바로우랑 국이랑 야채볶음까지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시켰다. 아프니까 리온이가 맛있는 거 먹고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는 먹을 힘이 없어 많이 먹지도 못한다고 한다. 항상 힘이 넘치게 많이 먹던 그가 밥을 조금 뜨다 그만두니 안쓰러웠다.
처음으로 내가 그보다 많이 먹은 날일 것이다. 그리곤 누워서 영화를 봤다. 중간중간 버퍼링이 심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다 뜨거워졌다. 버퍼링이 걸릴 때마다 참 재미있게 놀았다. 2시간짜리 영화를 4시간 만에 마칠 수 있었다.
저녁으로는 피자를 먹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적의 속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때에 그 또한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한번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라는 바람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의 깜찍한 생각들까지 알게 되었다.
<그들의 속마음>
그는 우리의 첫 만남이 상하이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했다. 파티에서 예쁘게 생긴 여자애를 만났고 말을 걸고 같이 어울렸다. (참, 그 날 그가 입은 흰 셔츠는 너무 안 어울렸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 한국에 대해 아는 척하려고 BTS를 카드로 꺼냈다. 나는 BTS를 잘 몰라서 당황스러웠고 그가 바로 유튜브 댓글창에서나 보던 서양인 케이팝 추종자 인가라고 생각할 뻔했다. 사실은 자기도 잘 몰랐다. 알고 보니 그는 나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더 붙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그에게서 왜!? 전혀 연락이 없는지 좀 궁금해하다 말았다.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그는 참 좋은 밤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재밌었고 언젠가 또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우리는 친구의 친구들이 서로 아는 사이었고 오고 가다 충분히 한 번쯤은 같이 어울릴 법도 했지만 교묘하게 타이밍은 몇 주간 어긋났다. 이미 연락할 시기는 놓쳤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 있는 걸까?
어느 점심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멀리서 그와 비슷한 사람을 바라보다 그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쿵 했다.
나 스스로도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다.
또 어느 오후에 우리는 잠시 마주친 적이 있다.
그의 친구: “헤이, 저기 규빈이야!”
리온:“어? 규빈? 어? 어딨는데?”
나는 왠지 쑥스러워 보이는 듯한 그가 좀 귀여웠고 쿨한척하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같이 처음으로 “데이트 같은 것”을 한 날, 갤러리에 다녀온 후 간 공원에서 벤치에 핸드폰을 놓고 갔었다. 그래서 다시 같이 공원에 가 핸드폰을 찾았는데 나는 이때 내 덤벙거림을 들켜 민망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핸드폰을 공원에 두고 와 좋았다고 했다. 나와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혹시나 나 또한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놓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는데 그는 말로는 가도 돼 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지 마 가지 마 ‘라고 외쳤다고 했다. 나 또한 어차피 안 갈 거면서 왜 그렇게 “나 가도 돼?”라고 물었던 건지. 이제야 그동안 속마음이 아닌 말들을 내뱉었던 서투른 우리들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 또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의식하고 있었구나, 아닌 척하면서. 덕분에 조금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간질간질하고 짜릿했던 그 순간들이 즐거웠다.
——
우리 둘 만의 날이었다.
추운 겨울, 밖에 나가면 얼어 죽을 날씨에 히터를 틀어도 방이 싸늘하니 우리는 조그마한 그 방에서 한껏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추운 계절을 좋아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울수록 우리는 손을 잡고 싶고 누군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온기를 나누고 싶어 진다. 전기장판 말고 손난로 말고 사람이 전해주는 그 온기는 되려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 추웠던 그 날이 따뜻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늘 얘기 나눈 사람도 얼굴을 본 사람도 그뿐이었다. 오늘만큼은 내 세계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집에서 뒹굴거리는 평범한 하루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을 만큼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