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본다. 주변에서 "그거 봤잖아 왜 또 봐"라고 하면 딱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좀 애매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더라.
일단 새로운 영화를 보는 건 도박이다. 예고편이 아무리 기가 막혀도 본편이 똥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얻는 게 "아 시간 날렸다"라는 감상뿐인 경우. 이게 은근히 데미지가 크다. 그냥 재미없으면 차라리 낫다. 진짜 최악은 기대를 잔뜩 하고 갔는데 중반부터 "아 이거 망했다"라는 걸 직감하면서도 이미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끝까지 보게 되는 그 상황이다. 매몰비용의 오류를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랄까. 특히 가장 강렬한 이 기억의 순간으로는 배트맨 vs 슈퍼맨을 개봉 첫 날에 보러간 기억이 있다. 그 유명한, 너네엄마도 마사야? 우리엄마도 마사야! 난 순간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다. 이 순간이 거짓말이길 빌면서 그 영화를 끝까지 봤던 끔찍한 기억이 남아았다.
반면에 이미 재밌게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건 최소한의 품질이 보장돼 있다. 그 영화가 나한테 줬던 감정의 윤곽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물론 처음 봤을 때만큼의 임팩트는 없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비슷하게나마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핵심이다. 처음 본 맛집에 또 가는 거랑 같다. 첫 방문의 감동은 없어도 "여긴 확실하지"라는 안도감이 있다. 새로운 식당을 뚫어서 또 하나의 맛집을 발견하면 좋겠지만, 그 과정에서 돈과 시간을 날릴 리스크를 감수하느니 검증된 곳을 가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근데 안전지향만이 전부는 아니다. 같은 영화인데 볼 때마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는 게 진짜 이유다. 처음 볼 때는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바빠서 디테일을 놓친다. 두 번째 볼 때는 결말을 알고 있으니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 속에서 복선이라던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의미없어 보이지만 의미있는 대사, 그리고 영화의 진짜 주제의식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어 가타카를 급식시절에 학교에서 틀어줬을 때는 그냥 유전자 사회에서 꿈을 이루는 빈센트의 이야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다시 봤는데 제롬의 자살 장면이 나온다. 첫 관람 때는 기억에 아예 없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또 보고, 또 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롬은 우성유전자로 태어난 인간이다. 가타카 세계관에서 인공수정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우울증 인자 같은 건 애초에 제거된 상태로 태어난다. 수사관을 하대할 정도로 자기 유전자에 프라이드가 넘치는 사람이 비관 때문에 죽는다? 말이 안 된다. 계속 곱씹다 보니 답이 나왔다. 제롬의 자살은 비관이 아니라 성공이었다. 빈센트의 로켓이 점화됨과 동시에 소각로가 점화되고, 은메달이 불빛에 반사돼 금메달이 된다. 열성유전자로 모든 것을 이뤄내는 빈센트와 우성유전자로 자기 소멸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제롬. 처음 봤을 때는 빈센트의 영화였는데 여러 번 보니까 제롬의 영화가 됐다. 한 번 보고 끝냈으면 절대 닿지 못했을 해석이다. 이 내용은 내가 이 글 여기에서 자세하게 풀었던 내용이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같은 영화를 또 보는 게 전혀 이상한 행위가 아니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분명히 봤는데 기억에 없는 장면들까지 나온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저장하는 게 아니라 인상적이었던 몇몇 장면 위주로 손실압축 저장을 해버리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들은 거의 새 영화 수준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같은 영화를 "또"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버전과 실제 버전의 차이를 확인하러 가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그거 왜 또 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같은 영화여도 그때의 상황과 그때의 기분, 그리고 기억의 용량에 따라서 다른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