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동화책들은 이원화된 세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게 선악으로 나눠져 있고, 주인공이 끝내 승리하여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고전적인 법칙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런 이야기들은 조금씩 변화를 맞이했다. 마치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죽음과 다툼이 가려지고 화해와 화합의 관계로 발전하는 이야기의 변조는 내게 있어서도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나와 다른 혹은 나와 대적하는 타자를 용인할 수 없는 방식의 사고는 건강한 관계와 사랑을 이야기하기엔 좋지 않을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교육적인 목적을 가진 글에 주로 사용된다. 다분히 아이들의 동화책이 아니더라도 종교적 교리나 인문학적 소양 역시 이야기를 통한 경험의 확장으로 사고의 폭 역시 넓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고전적 가치를 지닌 좋은 이야기들은 그만큼 추천 도서로 널리 읽히곤 했다.
최근 동향은 책보다는 영상 매체를 선호하는 만큼 시청각적인 자료를 활용해서 더 몰입감 있는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양질의 정보를 가려내는 비판적 수용능력이 함께 요구되기도 한다. 최근 청소년들이 한자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어휘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말을 하는 어른들이 있다. 실제로는 어휘력 자체가 낮아진 것보다 아이들이 쏟아지는 정보량에 비해 그것을 가려낼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밝혀진 것은 이미 많이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때 아이들을 가르치고 콘텐츠를 만들어 제공을 하는 입장이 되어 보고 나니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전해줄 이야기는 우리가 바라는 최종적인 세상의 모습이 담겨있다."라는 것이다.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아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줄 이야기는 당연히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고, 아이들이 살아갔으면 하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오늘에 와서야 우린 상대를 없애고 살아남는 것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바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건 세월에 닳은 어른의 소망이었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픈 인류학적 유산이었다. 결국 한 사람의 어른으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겪어야 하는 무게와 아픔이 있다. 살아있다면 걸어가야 할 여정에 필요한 나침반처럼 이야기는 되어야 할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선한 것이 옳다는 믿음은 옳지 못한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느낄 때 전해졌듯이 이제 우리는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관계를 갈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날에는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그때부터 쭈욱 그날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이제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할 세계를 만들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