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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곰 Jun 21. 2023

같이 걷는 길

다른 사람들이 만나 같은 길을 걷기까지




산책을 할 때 초록이 가득한 나무만큼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힘차게 걷는 젊은 사람들과 달리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 노부부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 눈길이 멈춘다. 내가 산책하는 길은 공원 옆 숲길이라 중간중간 공원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여있다. 목적지를 찍고 다시 돌아오는데 그분들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계셨다. 몸은 괜찮은지 잠깐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곧 아무 말 없이 공원을 바라보셨다. 달리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자연스레 나와 내 남편이 떠올랐다. 결혼 생활을 풀자면 누구나 책 한 권씩 나오겠지만 우리도 녹록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내 인생은 180도는커녕 540도가 바뀌어있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단 한 시간도 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어쩌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모임에라도 다녀올라 치면 육아가 나보다 더 서툰 남편의 전화를 10통은 받아야 했다. 결혼 전엔 혼자만의 시간이 이토록 간절한 적이 없었는데. 무얼 하든 늘 발이 묶여있는 것 같아 갑갑했다.


아이에게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잘 키우고 싶었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집에 오면 휴대폰과 함께 소파일체가 되는 남편이 미웠다. 하루종일 아이와 떨어져 있었으니 아이와 눈 맞추고 좀 놀아주면 어디가 덧나나. 당신이 놀아줘야 나도 내 할 일을 하는데. 아이는 같이 낳았는데 나만 노력하고 고생하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참지 못해 한 마디 시작하면 다시 냉전은 시작됐다.


그렇게 10년을 치고받다 보니 조금씩 상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 내 인생을 희생한다고 생각했는데 남편도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다만 나처럼 표현하지 않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내 감정에 치우쳐 있을 땐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 감정이 지나가도록 기다려 준 남편이 이젠 고맙다.


오랜 시간 따로 살아왔지만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같이 살아야 하는 게 부부다. 그런 사람을 마주하는 게 힘겹다면 삶 자체가 힘든 고통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를 내려놓고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먼 훗날 머리가 하얗게 세인 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부부가 우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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