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by 박이운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을 위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합니다.”


구로키 아키라는 문예지와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여전히 모른다.

8년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쟁이로 8년을 살았다. 사람과 세상이 나를 밟고 지나가는 동안 나는 내 안에 나만의 작은 마을을 만드는 것에만 열을 올렸고, 자연히 세상과는 점점 멀어졌다. 남는 시간엔 홀로 그 마을에 머물며 오래된 꿈을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꿈이 현실과 데칼코마니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로키 아키라의 책을 처음 발견한 건 1999년 겨울이었다.

IMF, Y2K, 세상의 종말로 떠들썩하던 그 해 겨울,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주 어려서부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몇 번이나 없애버렸었기 때문에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먼지에 파묻혀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하며 21세기를 맞이했다. 그렇게 해서 색이 바랜 구로키 아키라의 작은 문고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문고본은 그의 첫 단편집『거북이는 왜 새벽마다 북쪽으로 향하는가』(1973)였다. 하지만 그가 제목에서 던진 질문의 답을 책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거북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작품이 그런 식이었다. 그의 생전 인터뷰 까지도.


“이번 작품을 통해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거울 속 당신 얼굴에 얼룩이 보이지 않습니까?”


결국 그는 특유의 모호함과 대중성 결여를 이유로 매스컴의 주목은 물론이고 어떠한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같은 마니아 층이 존재한다.


구로키 아키라는 그의 첫 장편소설인 <바람은 왜 내 쪽으로만 불어오는가>(1979)의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이 힘들어서 글을 쓴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간단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글을 써온 그가 한 이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과 이해를 하는 것 사이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깊은 심연이다. 나는 한동안 그 심연 앞에 멈춰 선 채 바람을 맞았다. 서 있건 달리건 바람은 늘 내 쪽으로 불어왔다. 몸을 돌려 바람을 등져도 바람은 여전히 내 얼굴을 스쳤다. 그뿐이었다. 아키라는 이 작품에서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까마귀가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가며 남긴 말로 끝을 맺을 뿐이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의 이 마지막 대사가 왜 그렇게 내 심장을 후벼 팠는지 모르겠다. 내가 번역한 까마귀어의 의미는 이러했다.


“확신을 가져. 동시에 모든 확신을 의심해.”


난 글에 대한 대부분을 구로키 아키라로부터 배웠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글을 쓴다는 것이 힘든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지, 씀으로 인해 삶의 고통이 사라지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떤 ‘시도’를 하려고 했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과 문학을 추구하겠다면 망설임 없이 구로키 아키라를 권하겠다. 쓰고 싶을 때만, 쓸 수 있을 때만 쓰는 사람은 이 정도밖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사유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스스로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언어는 늘 물도 없는 깊은 우물 바닥에 놓인 채로 하늘을 바라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글이 무어냐 묻는다 한들 그에 대한 답을 글로 풀어쓸 수도 없다. 그래서 엘라 피츠제럴드도 재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런 식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리라.



이 이야기는 2013년 7월에 시작해서 3개월 뒤, 그러니까 같은 해 10월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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