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Part 1
1
“정치가들, 대기업 총수들, 언론들 싹 다 뒈져 버려라.”
양은 축 쳐진 모습으로 카운터에 올려놓은 양 주먹을 있는 힘껏 쥐며 소리쳤다. 그는 바 구석에 걸려있는 벽걸이 TV를 노려보고 있었다. TV에선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정경언 유착 비리 관련 뉴스 보도가 한창이었다. 나는 카운터 앞에 양과 나란히 앉아 양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은 이내 고개를 떨구고 꽉 쥐었던 주먹을 펴 손바닥에 난 손톱자국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바에선 추억의 히트 팝이 연달아 흘러나왔고, 다른 손님들은 뉴스나 양의 고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너나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마치 대학 축제 주점 같았다.
“돼지새끼들이야.”
양은 힘이 빠진 양 귀를 축 늘어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배를 채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니까. 그렇게 배를 채워서 자식새끼들을 깨끗하게 꽃단장시키면 뭐 해? 꽃단장한 돼지새끼가 될 뿐인걸. 정말 화가 나.”
나는 단 1초도 입이 마르는 것이 싫은 사람처럼 맥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G에게서 맥주를 리필받은 양이 맥주잔의 물기를 냅킨으로 닦았다. 그리고 새 냅킨으로 물기가 묻은 양손을 공들여 닦았다. 나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바에 울려 퍼지는 비틀스를 따라 부르며 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이 구루- 데-바- 오옴.”
양은 잔과 손의 물기를 다 제거한 후에야 말을 하기 시작한다. 늘 그랬다.
대학 시절에 만난 나와 양은 얼마 전 둘 모두 자발적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나보다 먼저 실업자가 된 양은 내가 퇴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냈다. 우리가 한 달간 마신 맥주는 어쩌면 한강 수영장을 가득 채울 정도일지 모른다. 그렇게 퍼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숨이 턱턱 막히는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웬즈데이 바의 카운터 뒤 벽 중앙에는 오래된 장식용 괘종시계가 서있었다. 시곗바늘이 없어서 그런지 한참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았다. 시계 아래로 길게 늘어진 시계추들이 마치 고전 영화에 나오는 귀족 여성들의 길게 말린 헤어 스타일 같았다.
바텐더 G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런 것도 같다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답했다.
“시곗바늘도 없는 시계 따위가 왜 존재하는 걸까요??”
“시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시계 자체는 필요한 사람들도 있는 거겠지.”
나는 입을 작게 오므리며 ‘오’하고 감탄한 뒤 다시 맥주를 마셨다. 시계나 달력 같은 걸 애초에 발명하지 않았다면 우주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애써 붙잡지 않았다.
“화가 난다고."
양은 손의 물기가 제대로 닦였는지 점검하듯 두 손을 맞잡고 비비며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양이 이른바 ‘권력자’들을 욕하는 건 대학시절부터 이어져 왔고, 실제로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양의 아버지는 대기업 고위급 임원으로 강남에만 집을 세 채나 가진 부자였지만,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면 “난 선택권이 없었을 뿐이야.” 하고 답하곤 했다.
가끔 나는 양을 향해 “지금도 선택 안 하잖아.” 하고 취기를 빌려 농담반 진담반인 말을 던지기도 했는데,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칠 말을 고민하는 양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미안해졌다. 내가 양의 입장인들 과연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는 몰라. 내가 왜 저들을 극혐 하는지.”
이 말을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난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저들은 스스로 등도 긁을 줄 몰라서 돈 주고 시키기까지 한다니까. 분명 그럴 거야.”
“그래?”
“응. 똥도 닦아 달라고 할걸? 똥 닦는 법을 못 배웠거나 손을 더럽히기 싫거나 둘 중 하나지. 많이 먹는 만큼 싸지르는 양도 어마어마해.”
나는 포마드로 정갈하게 가르마를 탄 정장 차림의 정치인이 바지를 내리고 엉거주춤하게 서서는 다른 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다가 몸서리를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뭔 줄 알아?”
“글쎄.”
“본인들 피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아니, 생각이라는 걸 안 할지도 모르니 그냥 태생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거라고 해두지. 마치 고급 차에 고급 휘발유를 넣어야만 차가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거랑 같은 거야. 기름값 따위는 신경 쓸 거리도 아닌 거지. 하지만 나나 너는 그렇지 않잖아? 어떤 차라도 보통 휘발유로 충분히 굴러간다는 걸 알거든. 그리고 우린 연비를 따져야 해. 안 그래?
“그건 그래.”
“그래, 그렇다니까.”
양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듯 맥주잔을 비웠다. 그리고 G에게서 다시 리필을 받아 잔과 손의 물기를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모두 우주 먼지에 불과해.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지 않을까?” 나는 우주적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참이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먼지에 불과하더라도 자의식을 가진 이상 역겨운 것들을 목격했을 때 구토가 올라오는 걸 참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난 뉴스나 신문 같은 걸 보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언론사들도 자신들만의 기조가 확실한 탓에 기사에서 또 뉴스 보도에서 어떤 ‘색깔’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질려버렸다. 다양성의 수용을 외치는 사회에서 언론이 한다는 일이 고작 편견에 사로잡힌 목소리를 내어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림들로 하여금 구독하게 만들거나 편견이 없는 사람들에게 편견을 주입하는 일 이라니. 난 뉴스를 보느니 차라리 아키라의 책을 읽고 빌 에반스 트리오의 재즈를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화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양에게도 권해보려 했지만, 지금 그의 마음엔 여백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2
내가 양을 처음 만난 해에 나는 대학 2학년이었고, 양은 재수를 해서 막 입학한 새내기였다. 양을 처음 만난 날 난 야구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술자리에 참석한 참이었는데, 그 해 내가 주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돌아가며 술을 따라준 탓에 만취해 있었다. 해서 내가 어떻게 양과 함께 모범택시에 타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우리 둘 다 아는 친구라도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택시가 양의 자취방이 있는 잠실 부근에 내려주자 양이 자신의 단골 바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우린 나란히 병맥주와 피자를 시켜놓고 어느 것 하나 입에 대지 않은 채 바 사장(그땐 알지 못했지만, 그가 바로 G였다.)이 영업 종료를 알리며 깨울 때까지 소파 부스에서 곤히 잤다. 잠에서 깬 우리는 G가 정성스레 포장해 준 피자와 병맥주를 들고 한강까지 걸어갔다. 고수부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린 아무 말 없이 강물을 바라보며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에 양 볼을 번갈아. 양은 피자를 먹었고, 난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맥주가 떨어지자 너나 할 거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으로 향했다.
“동갑이니까 말 놓을게.” 난 양의 말에 동갑이었구나, 생각하고는 그러라고 했다. 허락을 구하거나 대답을 바라는 어투는 분명 아니었지만, 대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우린 맥주를 4캔 사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3월의 강바람은 꽤나 차가웠다.
“나를 양이라고 불러줘.”
“별명이야? “ 내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비슷한 거야. 이유는 잊어버렸고. 호칭이란 게 한 번 불려지기 시작하면 그대로 달라붙어서 스며들잖아. 동기화되는 거지.” 양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다 마신 맥주 캔을 납작하게 밟은 후 쓰레기통에 던져 골인시키기 위해 한참 공을 들였지만, 결국 둘 다 쓰레기통 코앞에서 던져 넣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운동선수 안 하길 잘했다.”
"이하동문.”
3
양과 난 군대를 다녀온 후에야 도서관이라는 곳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난 전공 공부엔 도저히 흥미를 붙일 수가 없어 소설책만 읽었고, 양은 나와 달리 강의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전공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가 전공 서적이 아닌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졸업 후엔 책 읽는 모습 자체를 볼 수 없었다.
내가 가방에서 심심풀이용 책을 꺼내 들면 양은 늘 새가 허수아비를 보듯, 궁금하지만 가까이하진 않겠다는 다짐이 어린 눈을 했다.
“왜 그런 걸 읽는 거야?”
“왜 맥주를 마시는 건데?”
나는 닭똥집과 양파를 번갈아 집어 먹으며 양을 쳐다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양은 내 질문에 답하려는 듯 엄지와 검지로 턱을 잡고 5분쯤 생각했다.
“맥주의 좋은 점은 화장실을 가게 만든다는 거야. 적어도 움직이게 만들고 체액을 순환시켜준다고.”
양은 그렇게 말하고서 계속 닭똥집과 양파를 번갈아 집어 먹고 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체 왜 주구장창 책을 읽어?”
나는 남은 닭똥집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씹다가 맥주와 함께 삼키고 나서 접시를 한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잠시 옆으로 치워놨던 <화차>를 편 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모양의 책갈피를 바 카운터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 이거든.”
“그럼 비현실 적인 책은 안 읽는다는 말이야?”
“그건 더 현실 같지.”
“어째서?”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해. 그러니까 비현실직인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야.”
나는 벽걸이 TV에 나오는 마이클 잭슨의 스무스 크리미널 무대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 고꾸라지지 않는 마이클 잭슨의 안무는 언제 봐도 예술이었다. 양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우리가 사는 현실은 비현실이야?”
“글쎄.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현실을 정확히 설명하고자 한다면 결국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할지도 모르지.”
G가 빈 잔을 가지고 가서 생맥주를 새로 따른 후 우리 앞에 가져다주었다.
“비현실이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 우주는 결국 시뮬레이션인거지, 뭐."
양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
나는 말없이 잔을 들어 양의 잔에 살짝 부딪혔다. 맥주가 가득 찬 잔들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건 2년 전이었어.” 양이 말했다. “제목도 작가도 생각나지 않지만, 내용은 기억나. 주인공은 유명한 배우로 서른 살 남짓한 남자인데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
"어느 행성에서 왔는데?”
"잊어버렸어. 주인공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화성이겠지. 다른 행성에 무슨 외계인이 있겠어? 그래서 그 남자는 다른 외계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인종의 여자들한테 씨를 뿌린다는 내용이야. 오키나와, 칸쿤, 발리 그리고 아이티, 온갖 장소에서 말이야.”
“아이티에서도?”
“그래... 그게 다야. 믿어져? 어째서 외계인의 정사 세계일주 따위를 소설로 쓰는 거지? 그것 말고도 쓸 게 많을 텐데?”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소설은 딱 질색이야. 나까지 더러워지는 기분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전혀 다른 걸 쓸 거야.”
“예를 들면?”
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런 거야. 들어봐. 내가 어떤 오지 마을로 여행을 갔는데 손님이 엄청 귀했던 탓에 마을 회관에까지 초대를 받은 거야. 이장을 비롯한 거의 모든 주민이 모여서 성대한 환영 잔치를 열어줬는데, 주민들이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마을 전통주를 따라주는 바람에 난 슬슬 취해가고 있었어.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서 어르신들과 형님, 아우 하고 있을 때 마을 이장이 자기 딸을 내게 소개하는 거야.
“엄청난 미인이겠지?”
“당연하지.”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뭐야.”
“계속 들어봐. 우린 말이 너무 잘 통해서 술김에 이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돼. 그러다 자연스럽게 정신을 잃어. 내가 너무 많이 마셨을 수도 있고, 술에 뭔가를 탔을 수도 있어.”
양은 그 지점에서 숨을 돌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꿈속에서 이장 딸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첫 날밤을 치르려는 순간이었어. 신부의 옷고름을 푸는데 가슴팍에 무슨 비늘 같은 것이 반짝하는 거야. 그때 신부가 두 팔로 나를 확 밀치는 바람에 잠에서 깨게 돼. 잠에서 깼을 때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 같아?”
"글쎄. 물고기 베개라도 껴안고 있던 거야?.”
“좀 더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친구. 난 통닭구이 자세로 나무에 묶여서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어. 몸도 안 움직이고 말도 나오지 않았지. 분명 술에 뭘 탄 거야. 사람들이 멈춘 곳엔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앞엔 사람 하나가 충분히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제단이 있었어. 난 산제물이었던 거지. 사람들은 나를 놓고 돌아갔고, 난 그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
“흥미진진 해지는데.”
“잠시 후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연못을 비추는 순간, 연못에서 괴성이 울리며 반인반어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우린 100년 전 이곳 사람들에 의해 수장된 이들의 후손이다.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지만 이렇게 산제물을 받으며 평화를 유지한다. 분명 이장 딸 차례로 알고 있는데 엄한 놈이 왔군. 상관은 없어.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라고. 그리고 그대로 잡아 먹히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반인반어가 되어 있더라, 하는 이야기야.”
“흐음.”
“슬프지 않아?”
“대체 어디가?”
“너무 메말랐군.”
4
양의 소설에는 뛰어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섹스 장면이 없다는 것과 완전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섹스를 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원래 그런 것이다.
“당신은 나를 먹지 않을 거잖아. 나는 알아. 날 사랑하지?” 다음 보름달이 뜬 날 제물로 끌려온 이장의 딸이 말했다.
양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하게 말하면 사랑과 죽음은 별개야. 모두들 잘못 알고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으음.” 양은 신음하고 나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따윈 없었다.
“난 아버지도 모셔야 하고, 이장 자리도 물려받아 마을도 이끌어야 해. 당신은 그런 거 없잖아. 내게 얼마나 많은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 알아? 난 꼭 살아남아야 해.”
그녀는 실성한 듯 웃다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양은 반인반어가 된 뒤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 길쭉하고 날카로운 두 송곳니를 어루만지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생전 피워본 적 없는 담배 생각이 났다.
“내가 너 대신 제물이 돼서 좋았어?”
“조금은.”
“정말로 조금이야?”
“… 모르겠어. 기억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양은 다시 뭔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진실을 원한다더군.”
“올리버 스톤.”
난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를 떠올렸다.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왜곡되는 중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낸 진실에 가깝다. 같은 사실에서 출발하더라도 서로 다른 진실이 탄생한다. 따라서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짠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케네디 암살 사건과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사건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사실을 진실로, 혹은 진실을 사실로 만들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일이다.
개인은 어떨까? 나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내가 존재한다는 건 사실일까 아니면 어떤 프레임이 씌워진 진실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와 너의 눈에 비친 ‘나’라는 존재는 과연 같은 존재일 수 있을까? 그래프에서 딱 하나의 값을 가진 ‘나’라는 점이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값을 달리한다면, 결국 관찰자가 우주에 개입하는 순간 모든 사실이 각자가 만들어낸 왜곡된 진실이 될 뿐이다. 따라서 좌표상의 점과 선이 하나의 값만을 가진다는 건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떠한가. 불변의 진리,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적용이 가능하고 언제 어디서나 성립이 되는 진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그렇다. 누군가는 뿌린 대로 거둔다. 선이든 악이든. 또 누군가는 선의 혹은 악의를 가지고 온 힘을 다해 뿌려도 뿌린 만큼 거두지 못한다. 하나도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둔다.
그때그때 다르다. Q.E.D.
이로써 불변의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5
어렸을 때 나는 무척 조용한 소년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말을 할 땐 마치 혼잣말을 하듯 소리가 너무 작았다. 걱정하시던 부모님이 여러 병원을 데리고 다닌 끝에 원인을 찾아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탓이었던 것이다. 부모님과 같은 교회 집사가 원장으로 있다는 이비인후과에 가 검사를 받은 뒤 밝혀진 사실이다.
의사는 시내가 훤히 내다 보이는 전망 좋은 빌딩에서 한 층을 통째로 임대해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원장실에 들어가 의사 앞에 앉자 간호사가 핫쵸코 한 잔과 카스테라 두 조각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게 한 손을 받치고서 카스테라 한 조각을 먹고 핫쵸코를 홀짝였다.
“더 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사는 나를 환자용 수동 리클라이너에 앉히고는 불빛으로 내 양쪽 귀를 한 번씩 들여다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
“귀 내부 구조가 선천적으로 많이 구불거리는 탓도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고막이 기형이라는 거야.” 그는 면봉 머리보다 작은 삼지창이 달린 가늘고 긴 막대를 내 눈앞에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이걸로 고막을 찔러서 터뜨릴 거야. 그럼 새 고막이 자랄 테고, 문제없이 듣게 될 거야. 내가 귀를 찔러도 괜찮지?”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의사가 리클라이너 등받이를 한 차례 더 낮추더니 내 양쪽 고막을 차례차례 찔렀다. 삼지창인지 포크인지가 고막을 찔러 터뜨릴 때마다 물속에 잠겨있던 내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막이 터진 후 들리는 소음은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설면서도 굉장히 날 것 같은 느낌의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이틀에서 사흘이 지나면 난 다시 물에 잠기곤 했다.
내 귀는 치료와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회복이 됐다. 여전히 한쪽씩 번갈아가며 물에 잠기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청력 테스트 결과지엔 ‘정상’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왠지는 몰라도,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자막 없이는 보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말 보다 침묵의 윤곽을 더 잘 듣게 되었다.
6
소변이 마려워서였을 것이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아침 일곱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남의 집에서 잠이 깨면 무덤에서 일어나 여기가 어디지 하며 서성이다, 누워있던 자리를 다시 찾아가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 누워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무거운 몸을 소파에서 겨우 일으켜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고는 변기 커버를 들어 소변이 취지 않았는지 확인한 후 손을 씻고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열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신선했다. 집 앞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들이 나를 향해 짹짹 혹은 삐약거렸지만,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도 역시 숨 막힐 듯이 더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팬티에 반팔 셔츠 차림을 하고선 소파 옆 싱글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나체의 여자를 바라봤다. 동향으로 난 창으로 들어온 햇살은 소파 끝에 멈춰 서서 그녀를 비출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녀는 잠결에 이불을 걷어차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던 그녀가 으음, 하고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돌아 누웠다. 끌어안은 인형에 눌려 볼록 솟아 오른 가슴이 무척이나 보드라웠다. 알몸의 여자가 바로 옆에 잠들어 있는데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런 욕구도 일지 않았다. 살갗이 너무 새하얘서 마치 하얀 곰팡이가 온몸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 탄식을 내뱉었다. 모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피부는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런 얼굴이라면 몇 시간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겠어,라고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를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파 앞 유리로 된 작은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담배를 한 개비 꺼내 피운 뒤, 5분 정도 여자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단념하고 담뱃갑 옆에 놓인 반쯤 남은 물병을 비운 후 다시 여자를 바라봤다. 대학생 혹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마른 편이었다. 나는 오른손을 내 눈과 그녀 사이에 위치한 후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힘껏 벌려 발꿈치부터 한 뼘씩 그녀의 키를 가늠해 봤다. 일곱 뼘이 조금 안 되었다. 157센티미터쯤 되는 셈이다. 키를 재다가 배꼽 주위에서 발견한 얼룩인지 흉터인지가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배꼽을 사이에 두고 좌우 대칭으로 있던 무늬는 물고기자리를 연상케 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더 아래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곳엔 살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숱이 적고 가느다란 음모가 잘 정돈된 정원의 잔디처럼 나 있었다.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재빨리 그녀의 발치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보르헤스의 <기억의 알레프>. 하지만 이상하게도 표지만 닳아있을 뿐, 페이지는 손에 닿은 적도 없는 것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나는 새어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고요와 어우러져 만들어 낸 궤도 위 한 점에 서서 꽤 오래도록 멈춰있었다.
7
그녀가 일어나기까지는 그로부터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잠에서 깬 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발견하기까지 5분이 더 걸렸다. 그동안 나는 창밖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구름을 바라보며, 저 정도 크기의 구름이라면 그 속에 바다와 같은 해양 생태계가 펼쳐져 있어도 놀랍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변에 앉아 하늘 위 구름을 바라보던 열다섯의 카프카가 구름 위에서 날씨의 아이를 만났다.
잠시 후 내가 돌아봤을 때, 그녀는 바닥에서 주워 올린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단단히 움켜쥐고는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려는 눈꺼풀을 연신 힘겹게 들어 올리며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누구야... 넌?”
“기억 안 나?” 난 최대한 차분한(척을 하는) 톤으로 대답했고, 그녀는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담뱃갑을 들어 그녀에게 건네봤지만 그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린 채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명해 봐.”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그녀의 처음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설명한들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최소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루했지만 기분 좋은 하루였어. 오후 내내 집에서 뒷산을 보며 책을 읽다가 해가 질 때쯤 차를 끌고 호숫가로 가 산책을 했어. 한 바퀴를 다 돌고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호수를 바라봤지. 늘 그렇게 하거든. 그러다 삼십 분쯤 지나니까 누군가가 만나고 싶어 진거야. 이상하지?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이 만나고 싶어지고,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 물가에 가고 싶어 져. 그래서 웬즈데이 바에 가기로 했어. 맥주도 마시고 싶었고, 친구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혼자 한 시간 동안 생맥주 두 잔을 마셨지.”
나는 거기까지 말한 후 그녀의 담배를 다시 한 개비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혹시 <끓어 오른 주전자의 모험>을 읽어본 적 있어?”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이불을 끌어안고서 창밖을 노려 볼 뿐이었다.
“혼자 술을 마실 때면 그 이야기가 떠올라.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전자 모양의 내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뜻하지 않은 모험에 나서게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하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모험은커녕 달그락 거리는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어. 그러다 다시 친구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웬 여자가 전화를 받는 거야. 처음엔 내가 잘못 건 줄 알았어. 그럴 친구가 아니거든. 술이 떡이 돼서는 두 명의 여자랑 같이 있다고 해도 전화를 안 받았으면 안 받았지 다른 사람이 받게 하지는 않는 성격이란 말이야. 내 말 이해돼? 난 내가 건 전화번호가 친구의 번호가 맞다는 걸 재확인까지 했지만, 다른 말 않고 급히 끊었어. 바보 같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이야. 전화를 끊고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어. 다 마시면 G를 불러서 계산한 다음에 바 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겠다는 나름의 계획까지 세웠지. 걸어서 한강이라도 갈까 싶었거든. 그런데 일어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살짝 휘청인 거야. 빈속에 생맥주를 많이 마신 탓이겠지. G는 내게 한강에 빠지지 않으려면 세수라도 하고 가라고 말했어. 난 하는 수 없이 화장실로 향했지. 남녀공용 화장실이라 잘 안 가려고 하는데,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여자들이 화장실을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래 사용한다는 거. 재촉하기도 싫고 재촉받기도 싫어서 어떻게든 참는 편이야. 다행히 그땐 화장실 문이 잠겨있지 않았어. 그래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문을 활짝 열며 들어섰는데 바닥에 네가 쓰러져 있던 거야. “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다음엔?”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재떨이에 재를 털며 말을 이었다.
“G를 불러 같이 부축해서 데리고 나온 뒤 손님들 중에 일행이 없나 찾았지. 그런데 아무도 널 알지 못하더라. 그래서 G와 함께 네 상처를 치료했어.”
“상처?”
“넘어졌을 때 목과 어깨 사이를 세면대에 부딪힌 모양이야.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상처를 찾으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쇄골과 승모근 사이 지점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국 손으로 더듬어 반창고가 붙은 위치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G와 의논했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내 차에 태워 너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 거야. 네 가방 속에 너에게 온 엽서가 한 장 있었고, 주소도 친절히 쓰여있었지. 열쇠도 바로 찾았어. 그렇게 된 거야. 하지만 네 술 값은 내가 계산했어. 가방은 어쩔 수 없이 열었다 쳐도 지갑에 손을 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는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정신 잃은 여자를 태우고 음주 운전을 하셨다?”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죄를 묻는다면 G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맥주를 마셔도 세수만 하면 운전을 해도 된다는 주의였다.
“근데 넌 왜 여기서 잤어?”
“?”
“왜 바로 돌아가지 않았냐고.”
“친구 중에 술에 취해 자다가 구토가 올라와서 질식사한 녀석이 있어. 대학 졸업 후 친구 몇 명이서 처음으로 양주를 마신 다음이었지. 녀석은 비틀거리지도 않고 씩씩하게 걸어갔다고. 그런데 다음 날 침대에서 전날 먹은 안주를 입에 가득 머금고 죽어있는 걸 친구 어머니가 발견한 거야.”
“그래서 밤새 내가 죽는지 안 죽는지 지켜봤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그건 아냐. 잠깐 지켜본다는 게 나도 깜빡 잠이 든 것뿐이야.”
“거짓말. 그럼 왜 일어나서 여태 여기 있는 건데?”
“너한테 설명은 해줘야 할 거 같아서.”
“사마리아인 나셨네, 아주.”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팬티 바람의 내 다리를 잠시 내려다봤다.
“혹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진 않았어...?”
“했지.”
“어떤...?”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별 거 아니었을 걸.”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떨군 채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냈다.
“엽서는?”
“주소만 보고 가방에 다시 넣어뒀지.”
“읽었어?”
“그럴 리가.”
“어떻게 믿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내 대답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그녀의 심문하는 듯한 말투는 날 짜증스럽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한 그녀의 모든 부분은 나로 하여금 그리워하게 만들기에 충분 헸다. 언제인지 모를 언제인가를, 누구인지 모를 누구인가를. 만약 어제 바에서 맨 정신으로 만나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지금 보다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몇 시야?”
나는 약간 안심을 하고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불을 재차 끌어안고 침대 머리맡 쪽 벽에 몸을 기댔다.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내가 그렇게 마셨음 난 벌써 죽었을 거야.”
“머리가 아파서 죽을 거 같아.”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난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새 물병의 마개를 따서 건넸다. 그녀는 수분이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반 병 정도를 단숨에 들이켠 후 다시 내게 물병을 건넸다.
“이제 가야 해.”
“어딜?”
“일하러.” 그녀는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툭 내뱉은 뒤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려고 번개처럼 일어났지만, 곧 갈 곳을 잃어버렸다. 그대로 잠시 엉거주춤하게 서있다가 침대 끄트머리로 가 앉아 세수와 양치를 하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군, 난 반대로 하는데, 하고 생각하는 사이 그녀가 화장실에서 외쳤다.
“옷 좀 갖다 줘.”
”어떤 옷?”
그녀는 있는 힘껏 미간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제발 더 이상 묻지 마. 아무거나 좀…”
나는 침대 맞은편 옷장으로 가 문을 열고 정말 아무 옷이나 집어서 화장실 입구 옆으로 가 손만 내밀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이보리색 민소매 원피스였다. 그녀의 속옷도 눈에 들어왔지만, 건네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두었다. 방 안은 깔끔했지만, 싸구려 가구들이 공간을 꽉꽉 차지하고 있어서 답답했다. 창문이 큰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정도였다.
“무슨 일 해?”
“알 바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화장실에서 원피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났다.
“몇 시야?” 하고 물으며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하얗고 가냘픈 소녀처럼 예뻤다. 그리고 젖꼭지가 살짝 비쳤다.
“10분 지났어.” 하고 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너도 얼른 옷 입고 돌아가.”
그녀는 천장을 향해 향수를 두 번 뿌리고는 비를 맞듯 머리를 가져다 대고 쏟아지는 향수를 맞았다. 베이비파우더 향이 났다. 내가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녀가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집은 있을 거 아니야.”
나는 소파 쪽으로 가서 바지를 찾아들고 다리를 하나씩 구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어디까지 가는데?”
“구청 쪽이야. 왜?”
“차로 데려다주려고. 늦은 것 같길래.”
그녀는 향수를 든 손을 내리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잘 들어. 난 분명 엉망으로 취해서 정신을 잃었어. 그건 내 책임이야. 누굴 탓하지 않아.”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향수병을 화장대에 큰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는 이어질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술 마시고 정신을 잃은 여자랑 자는 놈은 정말 최악이야!”
난 눈을 최대한 크게 뜨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오해야.”
그녀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눈에서 힘을 조금 뺐다.
“그럼 내가 왜 다 벗고 있는 건데?”
“네가 벗었어, 스스로. 내가 다시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 말을 나보고 지금 믿으라고?” 그녀는 가방을 열고 한참을 뒤지다가 화장대에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증명할 수 있어?”
"너 스스로도 확인이 될 거 같은데?”
“어떻게?” 그녀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맹세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정말인 걸. 믿어야지 어쩌겠어.” 이렇게 말하고 나자 스스로도 날 믿지 못하게 되어 짜증이 났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현관문 밖으로 나를 밀어내고 자신도 문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잠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골목을 따라 근처 공영 주차장에 세워 둔 차까지 걸어갔다.
내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 때까지도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차를 빙 둘러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차 뒤쪽에 선 그녀가 트렁크 전면을 덮고 있는 큰 유니콘 그림을 한참 바라보는 걸 백미러로 지켜봤다.
그녀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내게 물었다.
“네가 그렸어?”
"아니, 중고로 살 때부터 있었어.”
“왜 하필 유니콘을 그렸을까?”
“모르지.”
그녀는 호수에 다다를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워댈 뿐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두 모금 정도 피우고 타들어가는 꽁초를 바라보다 비벼 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기 말이야. 내가 어제 무슨 얘기를 했어?”
“여러 가지.”
“제발 그러지 말고. 하나만이라도 알려줘.”
“벽 얘기를 했어.”
“벽?”
"응. 이 세상의 끝에는 불확실한 벽이 있다면서.”
그녀는 날 빤히 바라보다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아무 기억이 없네.”
그녀의 이 말을 끝으로 우린 말이 없었다. 단지 살짝 내려진 창문 틈새로 바람이 우릴 대신해 쉼 없이 속삭일 뿐이었다.
그녀를 내려주고 집에 도착해서야 그녀가 조수석 등받이 틈새에 5만 원 권 한 장을 꽂아뒀다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