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Part 2

by 박이운

8


8월이 되자 기온이 한층 높아져 웬즈데이 바를 찾는 날이 부쩍 늘었다. 내가 바의 무거운 문을 한쪽 어깨로 밀고 들어가자 시원한 에어 커튼 바람이 내 열기를 단번에 식혔다. 실내 공기는 담배와 기름과 땀과 향수가 거미줄처럼 얽혀 위스키 캐스크통 밑바닥에 고여있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카운터 끝에 앉아 벽에 등을 대고서 바를 쓱 둘러본 뒤 G가 갖다 준 생맥주를 홀짝였다. 누가 봐도 군인인데 군인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20대 초반 남자 두 명, 그들과 동행인 여자 두 명,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한 쌍. 손님은 그들뿐이었다. 양은 오늘도 없었다.

나는 해쉬 포테이토를 주문하고 책을 읽으며 양을 기다리기로 했다.

10분쯤 뒤에 가슴이 유달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30대 중반의 여자가 가게로 들어와 나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녀는 내가 했던 것처럼 바를 한번 주욱 둘러보더니 G에게 하이볼을 주문했다. 위스키는 뭐든 상관없다고 했다. 하이볼을 박은 여자는 한 모금 마시고 계속 핸드폰 통화를 했다. 대부분 거는 전화였고, 상대방이 받으면 화장실로 가서 한참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약 30분 동안 그 행동을 4 차례나 반복했다. 하이볼 한 모금, 핸드폰 전화, 화장실.

G가 내 앞으로 다가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세 번째로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곧장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저, 혹시 보조배터리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가방을 열어서 보조배터리와 충전 케이블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케이블은 있는데 주인한테 충전을 부탁하기가 좀 그래서요.”

“아, 네.”

그 여자는 생긋 웃으며 고갯짓을 한 뒤 보조배터리를 핸드폰에 연결하고는 다시 화장실로 사라졌다.

나는 책 읽는 걸 포기하고 G에게 TV를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맥주를 마시며 야구 중계를 볼 생각이었다. 대단한 경기였다. 3회 초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3회 말까지 벌써 양 팀이 7점씩을 주고받았다. 한 팀은 홈런으로만, 또 한 팀은 상대팀 실책과 사사구로만 점수를 냈다. 그 사이 양 팀 투수는 도합 세 명이나 교체됐고, 광고는 이닝 전후를 포함해 9개나 나왔다. 기나긴 3회가 끝나고 4회 초가 시작된 후에야 여자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저기, 제가 한 잔 살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빚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나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거절하는 방법을 고민하려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G를 조용히 불러 내게 맥 주 한 잔을, 다신은 하이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약속이 있어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요?”

“반반이에요.”

“있다면, 여자?”

“남자요.”

“어머, 나도 그런데. 통하는 게 좀 있네요?.”

나는 잠시 TV로 눈을 돌려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쪽이 보기에 내가 몇 살로 보여요?”

“스물아홉?”

“에이 무슨 요.”

“스물여덟.”

여자가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기분 좋네요. 싱글로 보이나요? 아님 기혼?”

“리워드가 있나요?”

“있을 지도요.”

“그렇게 묻는 사람은 대체로 기혼자일 가능성이 높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2주 전에 돌아왔으니까. 돌싱이랑 이야기 나눠본 적 있어요?”

“아뇨, 하지만 절뚝이는 비둘기는 본 적이 있어요.”

“어디서?”

“캠퍼스에서요."

“학생?”

“몇 년 전까지는요.”

“좋을 때네.”

“어떤 점이요?”

여자는 킥킥거리고 웃더니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핸드폰을 챙겨 일어났다.

“다시 전화를 걸어야겠네.” 그리곤 화장실로 사라졌다. 답을 듣지 못한 내 질문은 잠시 방황하다 가게 안 무거운 공기에 눌려 위스키 캐스크통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난 결국 여자가 주문해 준 맥주를 반도 마시지 못하고 G에게 계산을 부탁했다.

“도망가는군.”

“네.”

"나이 든 여자는 싫어?”

“그런 건 아니에요. 혹시 양이 들르면 연락 좀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전화도 메시지도 통 답이 없네요.”

내가 G의 바를 빠져나올 때도 그 여자는 여전히 화장실 앞에서 통화 중이었다.

호숫가를 터벅터벅 걸으며 줄곧 머릿속에 떠오른 멜로디로 휘파람을 불었다. 오래된 곡인데,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곡명과 가사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 곡은 빌 에반스와 토니 베넷의 <영 앤 풀리시 Young and Foolish>였다. 가사는 이랬던 것 같다.


햇살 가득한 날의 미소

비 오는 날의 웃음

나는 바라고 바란다네

어리고 어리석었던

젊은 날이 다시 오기를


확실히 좋은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계속 휘파람을 불었다.


9


아침 7시 15분에 전화가 울렸다.

나는 아침 자유 수영을 가기 전 모닝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던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라디오 KMH의 <아침을 달려요!>입니다. 라디오를 듣고 계셨나요?”

“아뇨.”

“아, 이런. 여러분, 저희 청취자 분은 아니신가 봅니다. 안타깝네요. 그럼 지금 뭘 하고 계셨나요?”

“책을 읽고 있었는데요.”

“이런, 6-4-3 병살이네요. 지금은 라디오를 들을 시간이라고요! 라디오야말로 책과 음악의 아름다운 하모니라는 걸 모르시나요?”

“그런가요.”

“그렇고 말고요. 먼 미래에 라디오가 사라지면 그때는 책을 읽어도 됩니다. 아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말이 통하는 분이네요. 자, 시간이 없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제가 왜 전화를 드렸는지 아시나요?”

“아뇨.”

“청취자 한 분이 노래 신청과 함께 전화받으신 분의 사연을 보내왔어요. 신청자가 누군지 짐작 가시나요?”

“아뇨.”

“신청곡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인데요. 이거면 힌트가 좀 되려나요?”

나는 조금 생각해 본 뒤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만약 맞추시면 제가 쓴 책을 보내드린다고요. 좀 더 노력해 보세요.”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딱히 책을 받고 싶었던 건 아니다. 이번엔 뇌의 주름 어딘가에서 선인장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때요, 기억이 나십니까?”

“한 오 년쯤 전에 제가 선인장을 선물한 여자가 있어요.”

“오호, 어떤 여잔가요?”

“제가 좋아했던 여잡니다. 하지만 차였어요. 이별통보를 받은 후 며칠 뒤에 편지와 함께 선인장을 집 앞에 몰래 두고 왔습니다.”

“서사가 있네요. 좋습니다. 그분도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실 겁니다. 이름은 기억나시나요?”

나는 조금은 주저하며 기억나는 이름을 말했다.

“네, 우리 청취자분, 들으셨죠? 기억한다고 합니다. 라디오의 미친 영향력!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 전화받으신 분은 몇 살이시죠?”

“서른요.”

“한창 좋을 때군요. 직장인이신가요?”

“아뇨, 얼마 전 관뒀습니다.”

“무슨 일을 하셨죠?”

“출판사에 다녔습니다.”

“책을 어지간히 좋아하시나 보네요.”

“네.”

“어떤 점이 그렇게 좋죠?”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모든 책이요?”

“가끔 강요하는 책도 있죠.”

“어떤 책인가요?”

“제 잘난 맛에 사는 작가가 쓴 책이요.”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화가 밀려 올라오는 걸 느꼈다.

“오호, 어떤 책이 있을까요?”

“당신이 쓴 책.”

“헛! 훗! 호!”

짜증을 부르는 특이한 웃음소리였다.


10


선인장



잘 놓아두고서

한 달에 한 번만

잊지 말아 줘

물은 모자란 듯하게만 주고


차가운 모습에 무심해 보이고

가시가 돋아서 어둡게 보여도

걱정하지 마

이내 예쁜 꽃을 피울 테니까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칠 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게


그때가

우리 함께했었던 날 그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 서 있을게


11


며칠 뒤 배송 된 책을 들고 시립 수영장으로 수영을 갔다. 수영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가려다 문득 호숫가 산책이 하고 싶어 져 1층에 내렸다. 건물 입구 쪽으로 나가려는데, 입구 오른편에 꽃집이 눈에 들어와 무심코 방향을 틀어 꽃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게엔 손님은 없고 점원이 혼자 분무기를 들고 분주하게 여기저기 물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꽃을 둘러본 후에야 문득 그녀가 낯이 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주일 전 화장실에 쓰러져 있던, 배 언저리에 물고기자리 문양이 있는 아가씨였다. 안녕, 하고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살짝 놀라는 듯하더니 카운터로 가 분무기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왔다.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우연이야. 화분을 사러 온 거라고.”

“어떤?”

“선인장.”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잠시 날 바라보다 다육이 진열장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런 거?”

나는 천천히 다가가서 유심히 보는 척을 했다.

“특별히 찾는 게 있어?”

“물 잘 안 줘도 되고, 잘 안 죽으면 좋겠어.”

“아키노옵시스.”

그녀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꽃이 예쁜 건?”

“이거. 노토칵투스. 근데 피우기 어려울 텐데?”

“상관없어. 둘 다 살게.”

“네가 키울 거야?”

“선물할 거야.”

“보기와는 다른 구석이 있네.”

난 대답 없이 그녀가 포장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 듯이 빠른 손놀림으로 포장을 마쳤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 화분을 받아 들었다.

“덕분에 개시했어.” 그녀가 여전히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고마우면 커피라도 어때? 곧 점심시간이지?”

“커피 안 마셔.”

“그럼 넌 밥을 먹어. 커피는 내가 마실게.”

“난 혼자 먹는 게 좋아.”

“나도 그래.”

그녀는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날 잠시 바라봤다.

“사장님 오시면 먹으러 갈 건데 언제 오실지 몰라. 그리고 너랑 밥 먹고 싶지 않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기대를 품진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내가 말했었나? 넌 양아치 같아. 빈말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분무기를 들고 화분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12


내가 호숫가 산책을 마치고 웬즈데이 바를 찾았을 때 양은 마키무라 히루쿠의 엄청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읽은 것은 세 권으로 나뉜 버전이었지만, 양은 어째서인지 단행본을 구해서 보고 있었다.

“재밌어?”

양은 책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꽤 많은 책을 읽었어. 지난번 너랑 책 얘기를 나눈 뒤로. ‘불완전한 사람만이 또 다른 불완전한 사람이 들어와 채울 여백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 알아?”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 있어. 카프카였던가?”

“비슷해. 이런 말도 있지. ‘텅 비어있어야 유가 창조된다. 그리고 결국 무로 회귀한다.”

“누가 한 말이야, 그건?”

“자코 반 도르말. 어떻게 생각해? 텅 비어버린다는 거...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해.”

“어째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하고 성공한 적 있어? 그 생각도 결국 생각인데.”

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G에게 생맥주 한 잔과 쥐포를 주문하고 들고 온 종이가방에서 선인장을 하나 꺼내 양에게 건넸다.

“뭐야 이건?”

“생일 선물이야.”

“내 생일은 세 달이나 남았는데?”

“그땐 내가 여기 없어.”

양은 선인장을 덮은 책 위에 놓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세상이 더 지루해지겠네. 식물을 키워본 적 없어.”

“나도 없어.”

“어쨌든 고마워. 정확히 말하면 정말 기뻐.”


13


라디오에서 받은 책 <우울할 시간이 어딨어> 프롤로그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할 땐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 현관문을 나서기 어렵다면 일단 신발만 신어라. 그러면 반은 해결된다. 나머지 반은 이 책이 해결해 줄 것이다.”

난 책을 덮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그 여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신발을 신으려면 신발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알던 번호로 저장된 카톡 프로필 사진은 다른 누군가로 바뀌어 있었다. 컴퓨터를 켜서 이용한 지 오래된 소셜 미디어에 접속했다. 이름과 나이와 지역이 맞는 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정만 있을 뿐, 어떠한 피드도 없었다. 연락처도 없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난 몇 안 되는 그녀의 팔로워 중 내가 기억하는 그녀 주변 인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대학 동기다. 핸드폰에 그녀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울리기 시작한 통화 신호음을 들으며 무심결에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1시 30분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신호음이 가고 있는 상태라 계속 핸드폰을 붙들고 있기로 했다.

한참 신호가 간 후 포기하려던 찰나, 그녀가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저.. 늦은 시각에 정말 죄송합니다.”

“누구시죠?”

“저는 5년 전쯤에 S와 만나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날 떠올리려고 노력하는지, 아니면 아직 꿈속을 헤매는 중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S의 연락처를 알 수 있나 해서요. 이 번호는 S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찾았습니다.”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음... 그쪽이 그 사람이 맞는지 제가 어떻게 믿죠?”

“그렇네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뭘 증명하면 될까요?”

“당신이 그 사람이라면 우리가 커플끼리 강남에서 밥 먹은 날을 기억할 거예요.”

나는 가까스로 기억해 낸 식당 이름을 말하고 말을 이었다.

“당시 남자친구분이 그레이프프루트 에이드를 시켰죠.”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토익 900점대임에도 그레이프프루트가 자몽이라는 걸 몰랐다는 사실을 그들과 헤어진 뒤 S가 알려줬기 때문이다. 난 S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지만, 속으론 웃을 수 없었다. 난 토익 900점도 아니고, 그레이프프루트가 자몽인지도 몰랐으니까.

“맞는 것 같네요. 지금은 헤어졌어요. 그 사람하고는.”

내가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1분가량이 흐른 것 같았다.

“S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내가 S에게 차인 이후 S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고, S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동문회로부터 온라인 부고장을 받고 장례식장에 달려갔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늦은 시각에 전화를 걸어 미안했다는 뜻을 재차 밝히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슬픔과 알 수 없는 라디오 사연의 신청자 생각으로 그날 밤 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알기 전 난 이렇게 생각했다. 각자의 궤도를 돌다 실오라기 하나가 살짝 스친 것뿐일지 모른다고. 그래도 계속 궤도를 돌다 보면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녀가 라디오 사연을 신청한 것이 실오라기라면? 내가 알아채지 못하고 궤도를 도는 사이 실오라기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그럼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실오라기가 떨어져 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거리가 계속 멀어져도 실오라기를 붙들고 있는 한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도는 궤도의 주기는 얼마나 되는 걸까. 궤도를 도는 것은 나일까? 아니면 내가 서있고 궤도가 도는 것일까. 누구는 돌고 누구는 멈춰서 있는 걸까? 시간이 내 주위를 스쳐가는 걸까, 아님 내가 시간을 지나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궤도를 돌다 스치는 순간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우린 그저 광활한 우주 한 지점에서 먼지처럼 무작위 한 파동 안에 흩어져 있는 건 아닐까? 수백 가지 생각이 뉴런에서 뉴런으로 옮겨지는 탓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었다.

분명한 건 단 하나, 그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녀의 궤도 한 자리에 영영 멈춰서 버렸다. 그녀의 궤도는 더 이상 궤도로써 작동하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 궤도는 작동하는 궤도와 마주칠 수 없다.

생각을 멈추고자 머리를 힘껏 가로저었다. 부엌으로 가 커티 삭을 한 잔 마시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하지만 결국 거실로 나가 <선인장>을 틀어 놓고서 위스키와 함께 밤을 지새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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