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데알리스

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Part 3

by 박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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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인터넷에서 산 접이식 낚시 의자를 베란다에 놓고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래가 헤엄치고 있을 만큼 커다란 구름은 없었지만, 강아지와 고양이와 양과 토끼와 쥐가 유영하고 있었다. 비내음을 맡고 싶은 날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강아지도 고양이도 양도 토끼도 쥐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각자 바삐 흘러가는 세상에 나 홀로 멈춰있었다. 태양이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를 따갑게 비추는 탓에 무릎이 벌게졌다.

“여보세요. 나 누군지 알겠어??”

여자가 말했다. 마치 개화 시기가 한참 지나 낙화를 앞둔 벚꽃 잎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조용하면서도 치열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꽃은 잘 팔려?”

“그저 그래. 나랑 다른 시간에 일하는 여학생은 잘렸어. 불경기잖아. 식물에 나눠줄 온기가 남아있을 리 없지.”

“그래.”

그녀는 핸드폰을 쥔 손의 손가락으로, 아마도 검지 손톱으로 핸드폰 뒷면을 톡톡 두드렸다.

“네 번호를 알아내느라 꽤 고생했어.”

“그래?”

“웬즈데이 바에 가서 바텐더한테 물었더니 바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겉만 번지르르한 백수 같은 남자한테 물어보고 알려주더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었어. 읽어 보진 않았지만 책 표지를 알아.”

“책 표지를 알지만 읽지 않은 책이 꽤 돼?”

“난독증이 있어서 책을 못 읽어. 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인지 가벼움인지 알 도리가 없는 거야 난.”

표지만 닳아있고 페이지는 깨끗했던 그녀의 책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나도 그런 책이 꽤 많아.”

“가령?”

“고리끼의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고리끼>.”

침묵.

“사람들이 궁금해하던데? 일주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고.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어.”

사람들은 걱정하는 만큼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몰랐네.”

“... 혹시 나한테 화났어?”

“내가 왜?”

“너무 심한 소리를 한 거 같아서. 사과하고 싶었어.”

“신경 쓰지 마. 정 마음에 걸리면 꽃들 물을 좀 더 잘 챙겨줘.”

그녀가 한숨을 쉬었고, 이어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귀 기울이니 더 마마스 앤드 더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들려왔다. 꽃집인 것 같았다.

“꽃집에서 담배를 피우지는 말라고.”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관심 없어. 최소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됐던 거야 내가.”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는군.”

“그런 편이야.” 그녀는 이 말을 하고 잠시 침묵했다.

“오늘 볼 수 있을까?”

“좋아.”

“8시에 웬즈데이 바에서.”

“맞춰 갈게.”

“... 저기... 나 여러모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알아.”

“고마워.”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15


굳이 나이를 밝히자면, 난 서른 살이다. 아직 충분히 젊긴 하지만 어제보단 젊지 않다. 그래도 지금 죽을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 실연을 당했다.

첫 여자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아이였는데, 영원히 열일곱에 머물고 싶었던 그때의 난 그녀를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귀가 남달리 큰 탓에 다른 남자애들이 그녀를 놀리곤 했지만, 난 그녀가 좋았다. 교복을 몸에 꽉 붙게 입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녀는 그 유행과 잘 어울리는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우린 카페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전화통화도 잘하지 않았다. 난 말이 없는 소년이었고, 상대가 내 눈빛과 행동만 보고도 상대에 대한 내 감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첫 연애라 스킨십에도 젬병이었다.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사귄 지 네 달이 안 되어 친구로 지내자는 문자를 받았고, 그해 겨울 방학을 방 안에 틀어박혀 슬픈 발라드만 들으며 보냈다. 이후 2학년과 3학년 땐 같은 반이 되지 않았고 마주칠 일도 딱히 없었다. 난 실연의 아픔을 공부로 잊으려 했고, 그때 반짝 공부한 결과로 전혀 기대치 않았던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상대는 대학교에서 만났는데, 군 제대 후 복학한 나를 잘 따르던 후배였다. 내 첫 잠자리 상대이기도 했던 그녀는 나와 상당히 잘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해외 봉사활동을 갔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 나를 떠났다.

세 번째가 바로 S다. 각자 대학교를 휴학하고 학원에서 수업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됐는데, 당시 그녀는 학교 선배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원 남자 직원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들이대는 바람에 중간에서 내가 꽤 시달렸다. 가령 그녀가 내게 장난을 치거나 우리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그 남자가 보기라도 하면 발을 쿵쿵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쳐 간다거나 내게 불필요한 일을 시키거나 했던 것이다. 난 더 이상 엮이기 싫어서 곧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한참 후에 알게 됐지만 S도 나와 비슷하게 학원을 그만두고 휴학을 연장한 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고 한다. 그 뒤로 난 S를 몇 년이나 보지 못했다. S와 다시 만나게 된 건 스마트폰이 등장하면 서다. 스마트폰을 처음 사서 설치한 메신저 앱에 그녀 프로필 사진이 뜬 것이다. 버스를 타고 퇴근하던 어느 날 그녀 프로필을 발견했는데, 여전히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그녀 사진을 보고는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보냈다. 우린 3개월가량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거쳐 사귀게 되었고, 1년 반 정도 연애 후 그녀는 내게 한강에서 이별 통보를 건넸다. 그 뒤로 난 한강을 찾지 않았다. 양을 만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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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 희한하다. 흐르는 듯 하지만 흐르지 않고 공간처럼 놓여있다고들 하니까. 단지 우리 육신이 자연의 섭리대로 늙어가는 바람에 시간이 흐른다고 속고 있을 뿐이다. 시곗바늘이 움직이고 달력이 넘어가며 계절이 바뀌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뿐이다. 시간이 놓여있다는 것은 시제가 있는 언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우리 미물들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 말이 참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한 점으로 압축되어 놓여있으니까. 핸드폰 사진첩에 모든 순간이 담겨있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분초를 지나는 현재도, 알 수 없다는 미래도 결국 한 점으로 수렴한다. 영원토록 1960년 4월 16일 오후 세 시에 사는 아비, 2046행 왕복 열차에 갇힌 한 일본 사내, 그리고 어느 호텔 2046호실을 떠나지 못하는 차오처럼, 우리 모두는 내 감정이 머물고 있는 그 한 지점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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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웬즈데이 바 카운터의 가운데 자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거의 다 비워진 논알코올 모히또 잔의 밑바닥을 빨대로 휘젓고 있었다.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내가 그녀 왼쪽 자리에 앉자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난 약속은 지키는 타입이라고. 다만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을 뿐이야.”

“어떤 일인데?”

“차를 팔았다는 걸 까먹었지 뭐야. 대중교통을 타니까 확실히 시간이 다르게 움직이네.”

“그 중고차? 왜 팔았는데?”

“수입이 없으니까. 팔아서 차 살 때 개설한 마이너스 통장을 갚았어. 퇴직금 좀 보태서.”

“아쉽네. 오래됐지만 아늑했는데.”

“원랜 더 일찍 팔려고 했어. 에어컨이 가끔 먹통이 돼서.”

“왜 그런 오래된 차를 샀어? 기름도 많이 먹을 텐데.”

“차를 잘 모르지만, 이 차는 운행 주기동안 미션을 갈지 않아도 된다는 정보를 봤거든. 딱 한번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갈았던 것 말고는 튼튼한 차였어.”

“내구성을 중요시 여기는 타입?”

“그런 편이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자라지 못한 탓에.”

그녀는 빨대 끝으로 모히또 잔 바닥을 계속 휘젓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이 훨씬 더 가난해.”

“어떻게 알지?”

“여자의 육감. 태생적으로 알 수 있어 그런 건.”

나는 G가 가져다준 맥주잔 위 거품을 바라봤다.

“부모님은?”

“안 알려줄래.”

“왜?”

“난 말을 아끼는 타입이니까. 훌륭한 어른은 말을 아껴야 해.”

“네가 훌륭한 어른이라고?”

15초가량 그녀는 빨대를 휘젓던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도 상당히 진지하게 말이야.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당시의 난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거야.”

“왜?”

“언젠가는 얘기하게 될 텐데, 그 상대가 나라면 적어도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고, 첫 모금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동안 모히또 잔인지 빨대인지를 바라봤다.

“아빠는 오 년 전에 돌아가셨어. 지병이 있으셨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야. 아빠가 죽고 없어지니까 가게는 망하고 엄만 집을 팔았어. 빚은 갚았는데 금세 다시 빚더미에 앉았지. 엄마가 다단계에 빠진 거야. 그러고 나서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서 많이 본 클리셰 같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살아계실 거야, 어딘가에. 해마다 연하장은 보내오거든.”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맞아.”

“형제는?”

“쌍둥이 언니가 있어.”

“언니는 어딨 는데?”

“넌 귀신이 있다고 믿어?”

그녀는 질문을 던지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웃으며 모히또 잔을 옆으로 치웠다.

“넌 아무 말하지 마. 가족 욕은 당사자만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막상 하고 나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네.”

“신경 쓰지 마. 누구나 문젯거리를 안고 사는 거니까.”

“너도?”

“그럼. 매일 밤 내 키만 한 빼빼로 쿠션을 껴안고 울거든”

그녀는 정말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몇 년 만에 그렇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왜 논알코올 칵테일 따위를 마시는 거야? 술을 끊기라도 한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안 그럴래.”

“뭐 마실래 그럼?”

“아주 새카만 흑맥주.”

나는 G를 불러 생맥주와 ‘아주 새카만’ 흑맥주를 주문했다.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별로야. 겹치는 점도 많고. 속옷 같은 거. 제일 별로였던 건 사람들이 구별 못한다는 거였어. 전화를 받으면 늘 언니 이름을 부르며 부모님을 바꿔달라고 했어. 짜증스러웠지.”

“그 정도로 똑같앴어?”

“응. 부모님이 다른 숫자가 적힌 티셔츠를 입힐 정도였으니까. 이를테면 208, 209가 적힌 티셔츠 말이야. 그래도 열 살 이후로는 좀 나았어. 한쪽 귓볼이 잘려 나갔거든.”

그녀의 귀는 늘 머리로 덮여 있었기에 난 전혀 알지 못했다. 귓볼이 잘려나간 사연을 말해줄까 싶어서 기다려봤지만, 그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대신 왼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겨 귀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녀가 들을 수 없는 정도로 살며시 침을 꼴깍 삼킨 후 물었다.

“지금 어딨어?”

“뭐가?”

“귓볼 말이야.”

“그런 걸 보관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어딘가에서 썩어갔겠지.”

“귓볼이 없는 게 맘에 걸리진 않아?”

“응, 그다지. 머리 자르러 갈 때를 제외하면? 헤어 디자이너가 흠칫 놀라거나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지금은 드러내고 다녀도 상관없다고 생각은 하는데, C컬을 언제까지고 유지하고 싶은 것뿐이야. 가끔 귀걸이를 쌍으로 하고 싶을 때 아쉽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무슨 일을 했는데?”

“출판사에 다녔어. 책을 좋아하거든.”

“나도 책을 좋아해. 표지가 마음에 들면 사서 들고 다녀.”

나는 잔에 든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기본 안주로 나온 땅콩을 몇 개 주워 먹었다.

“있잖아... A5 사이즈의 300쪽짜리 보통 문고나 무선제본 한 권을 만드는 데 대략 0.01그루의 나무가 필요해.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연간 15억 권 정도가 판매된다고 추정하고 있어. 그럼 우린 한 해애만 1500만 그루의 나무를 베고 있는 셈이야. 책 만드는 용도로만. 그래도 책이 좋아?”

그녀는 내 입에서 눈을 뗀 후 담배를 비벼 끄고는 ‘아주 새카만’ 흑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넌 확실히... 특이한 구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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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날 차버린 여자 친구가 가버리고 나서 보름 뒤, 난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었다. 좋은 책이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신어로 ‘진성’이라 하는 진리성은 다른 건물들과 모양이 판이하다. 백색의 콘크리트로 번쩍이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 형 건물은 테라스에서 테라스로 이어져 공중으로 높이 3백 미터나 우람차게 솟아 있었다. 윈스턴이 보고 있는 전면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멋진 글씨로 붙어 있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무지는 힘‘이라는 대목이 맘에 쏙 든다. 오웰은 비극적인 예언가가 아니라, 인간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 작가였다.


나는 어마무시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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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수영장을 다닌 덕분에 뻐근해진 어깨와 허벅지를 풀어주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누워 있자니 근육을 푸는 것인지 니드라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울리는 벨소리를 배경음 삼아 하던 것을 계속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을 땐 전화를 받아야 했다. 벨소리엔 간혹 받아야 할 전화라는 느낌이 묻어날 때가 있다.

“나야.”

“응.”

“뭐 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나는 뒤꿈치를 땅에 붙인 채 양쪽 발끝을 번갈아 허공을 향해 들어 종아리를 당겼다.

“덕분에 많이 웃었어. 어제 말이야.”

“다행이네.”

“혹시 카레 돈가스 좋아해?”

“응.”

“하다 보니까 너무 많이 해버려서 일주일 내내 먹게 생겼지 뭐야. 좀 도와줄래?”

“그러지 뭐.”

“그럼 얼른 와. 한 시간 줄게. 제때 안 오면 다 버릴지 몰라.”

“응? 그건 좀 억지 아니야?”

“기다리기 싫어서 그래. 아무튼 빨리 와. 지금 바로 신발 신어.”

그녀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매트에 누워 천장 형광등 커버 안에 쌓인 날파리 시체들을 잠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20세기 소년에서 겐지가 부른 <카레 노 우타>가 귓가에 울렸다. 만화책으로 보기만 했던 노래가 귀에 들리다니 신기한 일이네, 하고 생각하자 문득 정말로 카레가 먹고 싶어졌다. 일어나 수염을 밀고 머리를 매만진 후 폴로 반팔 셔츠와 카고 반바지를 입었다. 정오가 되기 전이지만 해는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난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역전까지 가서 세계주류판매점에 들러 기린 스타우트 여섯 캔을 산 뒤 지하철에 올랐다.

그녀가 멜빵 청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일식 돈가스 카레와 직접 담근 피클을 차려 놓는 동안 난 맥주를 냉동실에 집어넣고 멀뚱멀뚱 서있었다. 집 안은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을 열어둔 탓에 더운 열기가 가득했고, 그녀는 선풍기를 켜며 카레 냄새가 집에 진동하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여름엔 요리 안 할래. 더워 죽겠어 정말.”

“더워 죽으면 지옥에 간대.”

“어째서?”

“지옥이야말로 더운 곳이니까.”

“억울하겠다. 더워 죽은 것도 모자라서 더 더운 곳으로 끌려가다니.”

“지옥 맨 아래층이 얼음 지옥이긴 한데 최고 형벌을 내리는 곳이라 더워서 죽은 것 가지고는 거기까지 못 내려간대. 대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티켓을 준대. 더위를 잘 버텨내면.”

“천국은 시원한가?”

“그보다는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리고 간다고 한들 행복할까? 더위가 그립진 않을까?”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코를 벌렁거리며 카레 냄새를 맡은 후 잘 먹을게, 하고 말하려다가 맥주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캔은 그다지 차가워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 캔을 따서 그녀 앞에 놓고 나머지 한 캔도 따서 그녀 앞에 들어 보였다.

“시원한 맥주만큼 따뜻해지는 마음!”

그녀가 캔을 들어 내 캔에 건배를 하며 말했다.

“그게 뭐야?”

“광고잖아. 몰라?”

“응, 몰라.”

“TV 안 봐?”

“어릴 때 주말의 명화 같은 건 많이 봤는데 지금은 그다지.”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물론이야.”

“난 뭐든 봐. 시간만 있으면 하루 종일 틀어놓고서. 어제는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어. 너도 봤어 혹시?”

“아니.”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확실히 타고난 천재였어. 직감적으로 중력에 대한 가설과 이론을 만들어냈지. 하지만 증명되지 않은 가설과 이론으로는 당시 성서처럼 떠받들어지던 뉴턴의 법칙을 수정하는 것이 어려웠지.”

“중력이 단순한 힘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휘어짐이라고 본 그건가?”

“정답.”

나는 맥주캔을 쥔 손의 검지와 중지를 펴보였다.

“그 증명을 에딩턴이 해낸 거야. 아인슈타인의 직감이 맞았지만 에딩턴이 없었다면 우린 여전히 뉴턴의 법칙만 배우고 있었을 거야. 여기서 문제. 그럼 직감이 중요한 걸까, 증명이 중요한 걸까?”

“글쎄. 어시스트가 있어서 결승골이 있는 걸까 결승골이 있어서 어시스트가 있는 걸까?”

“너한테도 그런 직감 같은 것이 있어?”

“거의 없다고 봐. 무딘 편이야.”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여자의 육감 같은 거.”

“도움은 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왓 위민 원트. 자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 나와 같은지 알고 싶을 때?”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남자들이란’ 하고 핀잔을 주는 듯 피식 웃고는 밥을 카레에 조금 묻혀 한 숟갈 먹었다. 열기가 조금 가라앉고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팝송을 틀어놓고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동안 그녀는 나의 대학 생활에 대해 물었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수중에 1,500원 밖에 없어서 학식을 포기하고 담배를 샀던 이야기나, 야구 동아리 이야기였다. 나는 야구 시합을 하다가 타자 배트에 맞아 기절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마에 아직 남아있는 흔적(혹)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복수하고 싶진 않았어??

“별로.”

“왜? 내가 너라면 보복구라도 던지고 싶었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어. 당시엔 어마어마하게 부어오르고 아파서 꽤 오래 고생했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야.”

“그럼 의미가 없잖아.”

“의미?”

“네 이마에 혹이 남게 된 의미 말이야.”

“부여하기 나름이지. 이렇게 너에게 보여줄 혹이 생긴 거잖아, 그 사건 때문에.”

그녀는 재미없다는 듯 입을 삐쭉거리고는 카레를 마저 먹었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작은 주방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물기를 닦았다. 그런 다음 비틀스 CD를 틀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녀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녀를 바라보니 원피스 안쪽으로 가슴골이 보였다. 오늘도 속옷은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자 난 귀가 빨개지는 것이 느껴져 그녀에게서 황급히 눈을 뗐다.

“맛있었어?”

“응 정말 맛있었어.”

“왜 늘 물어봐야지만 대답을 해?”

“대답은 질문에 대한 반응이니까.”

“아니,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내는 그녀가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알아. 근데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는 걸. 습관이나 버릇이라고나 할까.”

“널 위해 하는 말인데, 그거 고쳐야 해. 특히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면 말이야.”

“그래야겠지, 아마도. 하지만 내 맘대로 잘 되지가 않아. 사람이 변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그녀는 눈을 한 번 흘깃하더니 CD를 아델로 바꿔 틀었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별다른 일 없어?”

“응, 늘 없어.”

그녀는 새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슬그머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내 귀에 울리는 큰북 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릴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가 원하는 박동에 맞춰 조금씩 천천히 내뱉었다. 갑자기 그녀가 허리를 세우고 앉아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있지, 믿어도 될 것 같아.”

“뭘 말이야?”

“네가 지난번에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거.”

“갑자기 믿어주는 거야?”

“이유가 듣고 싶어?”

“아니.”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며 키득거렸다.

“얼마나 되는 높이의 벽을 쌓고 살아야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안 좋은 영향 말이야.”

“이를테면?”

“그냥 뭐... 전부. 폐가 된다던가 상처를 준다던가 하는 일. 내가 타인에게 주고 싶지 않은 걸 받고 싶지도 않으니까.”

“글쎄. 불가능할 것 같은데.”

“넌 어때? 내가 너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걸까?”

“전혀.”

“적어도 아직까지는?”

“응.”

그녀는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깍지 껴 잡은 후 오른손으로 덮었다. 난 아델의 섬원 라이크 유 Someone like you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가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가 손을 거둔 후 말했다.

“내일 여행을 떠날 거야. 좀 길지 몰라.”

“어디로 가는데?”

“어디든. 바람이 불고 물이 있는 시원한 곳.”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면 연락할게.”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여자를 떠올렸다. 15년 전 이야기다. 내가 준 곰인형을 든 그녀가 말없이 걸었고, 나도 그 옆에서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쉼 없이 생각했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양조위가 주연한 영화를 봤다. 주제가는 이런 노래였다.


꿈속의 사람, 내 마음의 소원

진짜일까, 거짓일까.

꿈이 이미 허무하다면, 왜 다시 꿈속의 사람을 찾을까.

지난 사랑은 꿈처럼, 환상처럼, 그러나 분명히 있었던 것처럼

그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안심시켜 놓고는 너무나도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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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내가 호모 이데알리스라고 말했다.


나는 전에 내 이상을 품은 짧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동안 줄곧 이 세상에 존재할 ‘호모 이데알리스’들에 대해 생각했고, 덕분에 현실적인 감각을 꽤나 많이 잃어버렸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이 이상과 감각에 의지해 세상을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슬픔이란 감정이 굳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세상은 현실주의자들이 있기에 굴러간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내 안의 ‘호모 이데알리스’를 마치 장미의 기사 그림처럼 꽁꽁 싸매어 내 마음속 다락 한편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현실 밖으로 나가지는 못한 채 다락 앞에 쪼그려 앉아 숨겨둔 것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호모 이데알리스’ 건 아니건, 그 여부와는 별개로, 난 외톨이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실연을 당할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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