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Part 4
21
그날 밤 양은 맥주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것은 좋은 징조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 대신 버번을 온 더록스로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우리는 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화장실 반대편에 있는 다트 머신과 씨름하며 시간을 때웠다. 우린 다섯 번이나 퇴계 이황이 그려진 지폐를 머신에 집어넣었다. 평생을 수양과 절제로 살았던 그가 그날 밤엔 누군가의 공허한 시간을 버리는 일에 사용되어졌다.
양은 매사 어느 것에나 진지하게 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다섯 번의 게임에서 내가 두 번이나 이길 수 있었던 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별 일 아니야.” 양이 대답했다.
우리는 카운터로 돌아와 맥주와 버번을 마셨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말라가는 목을 축이며 G가 선곡해 틀어 놓은 노래들을 들었다. <아이 워즈 본 투 러브 유 I was born to love you>, <아이 윌 비 데어 포 유 I'll be there for you>, <노 서프라이지즈 No surprises>, <티어드롭 Teardrop>, <뚜빠뚜빠띠>, <고백>, <날아라 병아리>, <인형의 기사 part 2>•••.
“부탁이 있어.” 양이 말했다.
“뭔데?”
“사람을 좀 만나줬으면 해.”
“… 여자겠지?”
양은 술잔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안 알려줄 거지? 난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일 테고?”
“너밖에 없으니까.”
양은 내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하고는 여섯 잔 째를 비웠다.
“같이 데려 올 여자는 있어?”
“커플 모임이야?”
“그게 자연스럽잖아.”
“있었는데 없어. 여행 갔다나 봐.”
“그럼 그냥 너만 와. 괜히 힘주고 오지 않아도 돼.”
나는 대학 시절 술집에서 알게 된, 양이 좋아한 여성이 양이 아닌 내 번호를 물어봤던 사실을 떠올렸다. 난 당연히 거절했다. 내 타입도 아니었지만, 양에게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 무리와 한 번 더 같이 어울린 적이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오후 한 시야. 그런데 넌 여자들이 대체 뭘 먹고 살아간다고 생각해?”
“오이와 셀러리.”
“설마.”
22
양의 최애 음식은 화덕에서 갓 구운 도우가 얇은 피자다. 그중에서도 채소 토핑이 많이 올라간 피자를 좋아한다. 나와 피자를 먹을 때면 그는 8조각을 반으로 잘라 4조각을 나에게 주고 자신은 남은 4조각을 접어 올려 아주 두툼한 한 조각으로 만든 후 양손에 쥐고는 햄버거처럼 먹었다.
내가 양과 처음으로 피자를 먹었던 한강 고수부지에서도 양은 그렇게 피자를 먹었다.
“피자의 뛰어난 점은 먹기 싫은 채소를 내가 먹는지도 모르게 도와준다는 거야. 그것도 아주 맛있게.
그날 밤 한강 고수부지는 흐르는 물마저 자신이 흐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고요했다.
23
S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젊은 여자의 경우에는 더 어렵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렵다. 그녀는 멈춰있고, 난 계속 늙어가며 그녀와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살아있는 나 역시 제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가 멈춰 설 지점을 고를 수 있다면 그녀와 함께였던 지점을 고르고 싶다. 불가능한 일을 생각하는 것은 끔찍이도 아픈 일이다. 그렇게 늙어간다.
그녀는 내 기준으로 보면 미인이었다. 작고 아담한 체형이지만 청바지를 입었을 때 비율이 완벽했으며, 작은 얼굴이 그 부분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새하얬고, 모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찜질방에서 잠든 그녀 얼굴을 바로 옆에서 봤을 때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말하면, 난 그때 천사가 바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늘 진지하게 영원한 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도 언제든 자기를 떠날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강하게 부인하면 “모르는 거야. 누구도 알 수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나와 만나던 스물넷의 S는 그때가 그녀가 살아온 인생 중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사라져 버렸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 자신조차 그 이유를 모르고 죽어야만 했던 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그녀가 손수 짜 주었던 목도리의 촉감이 그립다. 난 그 목도리를 언제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세상은 그녀를 언젠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목도리의 촉감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그녀를 그리워하진 않으리라.
24
끔찍한 꿈을 꾸었다.
나는 커다란 검은 새가 되어 동쪽을 향해 날고 있었다. 나에겐 발이 없었다. 발이 잘려나간 자리엔 핏자국이 검붉게 엉겨 붙어 있었다. 발이 없으니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착륙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날갯짓이 더 힘겨워졌다. 목적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혹은 이과수 폭포 둘 중 하나였지만 명확하진 않았다. 쉬지 않고 태평양을 가로질러 아르헨티나에 닿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순긴 날갯짓이 멈추고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구름들을 뚫고 밑으로, 밑으로 떨어졌다. 구름 속 물방울들이 내 몸을 얼렸다. 너의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존재 자체로 따스함을 주는 그 사람이 몹시 그리웠다.
꿈을 꾼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꿈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 한참이 걸렸다. 바다에 닿는 순간 잠에서 깬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온몸에 끈적하게 배인 땀을 샤워를 하며 꼼꼼히 씻어냈다. 샤워를 한 후엔 주방으로 가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만들어 갓 내린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었다. 목구멍에 아직 담배와 맥주의 때가 묻어있는 듯 시궁창 같은 맛이 났다.
그릇을 싱크대에 던지고는 아직 식지 않은 남은 커피를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하면서도 때를 벗기고 소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장을 열고 밝은 색 청바지와 흰색 마 셔츠를 걸쳤다. 양쪽 소매는 두 번씩 접어 올렸다.
시간이 아직 이르다는 걸 시계로 확인한 후 창고로 가 아버지의 책들 가운데 한 권을 골라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는 문과 책상이 있는 한 면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책장이었다. 내 공부방이기도 했던 그곳에서 난 아버지 책들의 제목과 표지를 숱하게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을 처분하고 작은 집으로 옮기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서재를 정리해 반 넘는 책들을 헌책방에 팔았지만, 창고엔 여전히 책이 가득했다.
눈은 책의 글자들을 읽고 있었고, 손은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남는 내용은 없었다. 아버지의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아, 구로키 아키라의 책만은 예외였다.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다. 나는 화장실로 가 물을 빼고 손을 씻고 머리를 매만진 후 때가 묻은 하얀 스니커즈를 신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지하 터널을 지나는 내내 창밖 어둠을 바라봤다. 그 어둠은 누구에게나 어둠일 테다. 하지만 그 어둠을 누구나 동일하게 받이들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2호선으로 갈아타자 지상이 나타났고, 이윽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물에 반사된 빛이 창을 통해 새어 들었다. 빛은 절대속도를 지닌다. 그리고 마치 일직선으로만 뻗는 것처럼 보인다.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져있다고 한들, 그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나는 눈부신 빛을 손바닥으로 가려보았다. 빛은 왜 손바닥을 통과할 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빛은 손을 통과하지만 그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존재할 수 있기에 그림자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걸까? 아인슈타인이 빛이었다면 에딩턴은 그림자일까? 그림자의 관측을 통해 빛의 이론이 증명되었다면 그림자가 있기에 빛이 있는 것이 되는 걸까? 과연 무엇이 먼저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지하로 내려온 뒤였고, 곧 내려야 할 역이었다.
내가 한 시 정각에 웬즈데이 바에 도착했을 때, 양은 바 앞 문턱에 앉아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고 있었다.
“왜 혼자야?”
쥐는 읽던 페이지를 마저 읽더니 정성스레 책갈피를 꽂고 책을 덮어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안 올 거야.”
“뭐?”
“우리 둘 뿐이라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인 후 셔츠 가장 위쪽 단추를 풀었다.
“그럼 우리 뭐 하지?”
“맥주에 피자.”
“좋지.”
25
양은 일주일쯤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탓일 수도 있고, 그 여자 때문일 수도 있다. 양은 어떤 연유로 컨디션이 별로인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양이 자리를 비웠을 때 난 G를 살짝 떠봤다.
“양이 왜 저러는지 알아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아마 여름이 끝나가기 때문이지 않을까?”
매해 가을이 다가올 때면 양은 확실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맥주는 버번으로 바뀌었고, G에게 우울한 발라드 노래를 틀어 달라며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쉬지 않고 요청했으며, 다트 머신과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앉아 손을 들여다보며 술을 마셨다.
“혼자 남겨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모르지. 방학 때마다 이곳에서 둘이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방학이 끝나면 자네는 잘 오지 않으니까. 취업하고서 둘이 여기 온 적도 거의 없지 않아? 지금이야 둘 다 무직이니 붙어있지만.”
“그런 걸까요?”
“응, 아마도. 그러니까 자네가 이해해 줘야지. 잘 달래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여자에 대해 들은 건 없으시고요?”
“딱히. 시간이 약이 되려나.”
G는 말끝을 흐리고는 다른 일을 하러 갔고,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바에선 양이 요청했던 발라드들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가을 낙엽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감성적인 노래들을 듣고 있자니 이미 가을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30분 정도 후에 G가 다시 카운터로 돌아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말했다.
“그런데 양이 정말 자네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거야?”
“그렇대도요.”
“거참, 이상하네.”
“뭐가요?”
G는 손에 쥔 컵의 물기가 다 닦였음에도 계속 닦으며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와는 의논할 줄 알았어. 뭐가 됐든.”
“왜 그러지 않은 걸까요?”
“그걸 모른다고? 에헤이, 이 양반아.”
“?”
“말하기 싫은 거지. 듣기 싫은 정답 같은 말을 듣거나 아님 인생을 달관한 사람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들을 게 뻔하니까.”
“제가요?”
“그런 느낌이 들어.”
“진심이에요?”
“전부터 그랬어. 다정한 듯 하지만 뭐랄까, 맘에 없는 말은 못 하니까.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말고.”
“알아요.”
“다만 자네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거니까. 그 뭐라고 하지?”
“노파심요?”
“그래, 그거.”
나는 웃으며 맥주잔을 비웠다.
“양과 얘기해 볼게요.”
G는 담배를 문 채 컵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G에게 생맥주 리필을 부탁하곤 화장실로 가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무심한 표정의 내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는 발라드들을 들으며 남들보다 이르게 맞이한 가을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셨다.
26
진정한 쿨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쿨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실연을 경험했을 무렵 나는 말을 줄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난 몇 년이나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습관이 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줄이게 되었지만.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한 쿨함과 말 수를 줄이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틀 때마다 주파수를 일일이 새로 맞춰줘야 하는 라디오를 쿨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렇다.
마음을 따르는 일은 원래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어려운 문제를 푼다던가 하는 어려움과는 본질이 다르다. 마음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따라서 마음의 문제를 없애거나 털어내거나 하는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저 한 지점에 멈춰 선 채 나아가지 못하는 나를 온몸으로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고, 하루 네 잔씩 커피를 마시고,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노래를 수백 번 돌려 들으며. 지금 스피커에선 악뮤가 노래하고 있다.
난 차라리 흘러갈래
모두 높은 곳을 우러러볼 때
난 내 물결을 따라
Flow, flow along, flow along my way
노래를 듣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모름지기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알을 깨고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프라이 팬으로 직행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역시 알 수가 없다. 내가 문제인지, 내 마음이 문제인지.
27
다음 날 난 양을 불러내 잠실 한강 수영장으로 갔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던 데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양과 나를 포함해 스무 명가량 되었는데, 대부분이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었다.
나와 양은 풀에 들어가 말 한마디 없이 경쟁하듯 25미터 레인을 전력으로 몇 번 왕복한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봤다. 풀 바깥으로 나와 타올로 몸을 감싼 후 나란히 선베드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세상과 동 떨어진 느낌이 드는 것이 사뭇 마음에 들었다. 맑게 갠 하늘과 구름 사이를 나는 새 떼가 보였다.
“어릴 때는 새 떼가 훨씬 많았는데 말이야.”
양이 선글라스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간은 대체 후손들에게 어떤 지구를 물려주고 싶은 걸까? 애초에 인간이 이 푸른 별의 주인도 아니지만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글쎄.”
“어렸을 땐 주변에 늪지가 꽤 있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물속으로 들어가서 개구리알을 잡아와서는 빈 유리 꿀단지에 물을 반쯤 채워 올챙이, 개구리로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곤 했지. 기억나?”
“그래. 옛날 옛적에.”
“다음 세대와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그거 알아? 내 동생 아들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뿐인데 전화기 장난감을 쥐어주면 손가락을 대고 ‘밀어서 잠금 해제’를 하려고 한다고. 정말 많은 것들이 금방 변해가는 세상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네디 암살 사건의 전모도 곧 밝혀지겠지.”
“그러려나?”
나는 대답하며 히죽 웃었다.
“옛날에는 달에 가고 싶어서 우주 비행사가 되려고 했어.”
“정말?”
“달을 좋아해. 그래서 케네디도 좋아진 거야. 미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포기해야 했지만.”
양은 5분가량 침묵했다.
“내가 부유한 집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날 가끔 도망치고 싶게 만들어. 그런 기분 알아?”
“앞에 나가서 대표기도 하는 날이 되면 교회에 가지 않고 도망가고 싶은 그런 건가?”
“그건 잘 모르겠네. 하여튼 못 견딜 만큼 괴로운 그런 기분이야.”
“그럼 도망가면 되는 거 아냐?”
“... 그렇지.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 무일푼으로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재취업 생각은 아예 없어?”
“우리 집 꼰대가 꽂아 주겠다는데, 거절했어.”
“왜?”
“그건 내 자리가 아니고, 내 옷이 아니고, 결국 내가 아니니까.”
“그럼 뭘 할 작정이야?”
양은 몸에 두르고 있던 타월을 걷어 발가락 사이를 꼼꼼히 닦으며 말했다. 마치 평소에 맥주잔 물기를 냅킨으로 정성 들여 닦듯이.
“소설을 쓰려고 해. 어때?”
“좋은데?”
양은 발가락 물기 닦기를 멈추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소설을 쓸건대?”
“당연히 좋은 소설을 써야지.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따라쓰면서 내 이야기를 녹여 보려고 해. 그럼 적어도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방식을 빌려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테지. 쓰면서 나 스스로도 요양이 될 테고. 괜찮지 않아?”
“괜찮네.”
“자신을 위해 쓰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대상을 생각하며 쓰거나.”
“대상?”
“그래.”
양은 가슴에 매달린 검은색 스와로프스키 펜던트를 매만졌다.
“몇 년 전 여자 친구와 함께 캐나다 밴프로 여행 간 적이 있어. 먼저 밴쿠버로 가서 국내선을 타고 캘거리 공항까지 간 다음에 차를 렌트해서 컬럼비아 아이스필드까지 가는 루트야. 230킬로미터를 달려서 빙하를 보러 가는 건데, 난 빙하보다 230킬로미터나 이어지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달리며 본 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 그런 대자연 속에 놓여 있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돼?”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요세미티에 갔을 때도 느꼈고, 밴프와 재스퍼에서도 느꼈어. 우린 과연 이 우주에서 ‘존재’라는 칭호가 붙을 수 있는 존재들일까,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하는 의문 밖에는 들지 않아. 어떻게 이토록 신비롭고 거대한 지구와 대자연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 수 있는 걸까. 내가 과연 이것들을 눈에 담을 자격이 있는 걸까. 창문을 열고 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새와 산과 나무와 물과 흙을 눈으로, 코로, 귀로, 손끝으로 맘껏 느꼈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말이야.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때 그 느낌은 말이야, 정말이지…… 뭔가에 푹 감싸인 듯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흙과 물과 나무와 산과 새와 바람과 구름과 하늘까지, 이 모든 게 하나가 되어 우주라는 걸 이루고는 날 감싸 안은 거야.”
양은 거기까지 말하고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손에 든 수건으로 눈 주위를 훔쳤다.
“글을 쓸 때마다 난 그 장면을 떠올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달리던 순간을.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새와 산과 나무와 물과 흙을 생각하며 뭔가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이야.”
양은 이야기를 끝내자 손을 다소곳이 모아 가슴에 대고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서… 뭘 쓰고 있어?”
“아직 한 줄도 못썼어. 쓸 수가 없는 걸.”
“그렇군.”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
“기억력 때문이다.”
우린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 돼서야 풀에서 나왔고, 시원한 맥주를 사들고는 호수까지 걸어갔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저 멀리 유람선의 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자 친구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최대한 덤덤한 투로 물었다.
쥐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손등으로 입을 닦은 뒤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너한테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무 바보 같아서 말이야.”
“사랑에 바보가 어딨 으며, 천재는 또 어딨 으랴.”
“그래. 맞다.”
양은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 세상엔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더라.”
“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일?”
“아니, 그런 거 말고. 손이 생긴 다음에도 손 쓸 수 없는 일.”
“이를테면?”
“예를 들자면… 그래, 잘못 보낸 이메일 같은 거야. 잘못 보낸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상대방이 읽은 뒤라 발송 취소가 안 되는 거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나기 시작해. 그리고 그다음엔 왜 잘못 보낼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 하나 띄워주지 않는지 이메일 서비스 회사에 화가 나기 시작하지. 마지막엔 그 회사에 화를 내며 따지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알겠어?”
“조금은.”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구멍이 난 보트에 타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같은 조건이야. 물론 구멍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사람과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있을 테지. 수영을 잘하는 사람, 수영을 못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용감한 사람도 있고 겁쟁이도 있어.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지. 하지만 그 망망대해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월등히 강한 사람은 없다고. 모두 겁을 먹고 있고, 모두 걱정하고 있어. 다 마찬가지인 거야. 부모를 잘 만났거나, 운이 좋았거나 상관없이. 그러니까 그걸 빨리 깨달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거 아닐까? 당장 눈앞에 결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말이야. 누구 말마따나 계속 스텝을 밟는 거지. 누구보다 멋지게. 안 그래? 인간 따위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어. 너 말대로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린 먼지와 같은 존재일 뿐인 걸. 단지 센 척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되고말고.”
“넌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거야?”
“응.”
쥐는 한참 동안 맥주병을 입에 문 채 병을 다 비울 때까지 홀짝였다.
호숫가에 다다랐을 때 양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양과 헤어진 후 혼자 웬즈데이 바에 들렀다.
“양과 얘기 좀 해봤어?” G가 물었다.
“네.”
“그럼 된 거야.”
G는 그렇게 말하고 내 앞에 쥐포 튀김을 갖다 주고는 씨익 웃었다.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