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묾과 나아감 사이

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Part 5

by 박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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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키 아키라는 방대한 작품량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철학이나 희망이나 사랑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극히 드문 작가였다. 비교적 진지한 반자전적 작품인 단편집 <휘바 섬행 슬로보트>(1987)에서 아키라는 농담과 역설, 궤변으로 얼버무리며 아주 조금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는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내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미 텅 비어있음으로 더 이상 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텅 비우지 못한 자들은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노력을 해서 모든 걸 소모시킨 후에 텅 비워지게 될 지어다, 아멘. 어떻게 고생하고 어떻게 소모시켜야 하는지는 일일이 쓰지 않겠다. 그래도 꼭 알고 싶은 사람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어주기 바란다. 거기 전부 쓰여 있다.


아키라가 <스토너>를 끔찍하게 좋아했던 이유는, 보잘것없을지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을 거의 처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정성스럽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걸 쓰면서도 다 읽고 나면 읽기 전에 알고 있었던 것들과 다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를 기척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어떤 매거진 기자가 인터뷰 중에 아키라에게 물었다.

“당신 소설의 주인공은 1963년에 죽고, 2046년엔 살아있으며, 시간에 흐름에 반해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과거행 기차에 탑니다. 이게 가능한 겁니까?”

아키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는 우리 우주의 시공간이 어떤 식으로 놓여 있고,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고 있나?”

“아뇨,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이 차원에선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요.”

기자의 말에 아키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유효한 반증이 발견되지 않은 가설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가설이네.”


아키라의 작품 중에 <산기슭의 쿤데라>라는 단편이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다섯 살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자세한 부분은 잊어버렸지만 대강의 줄거리를 여기서 써보겠다.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난 소년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소년의 꿈을 짓밟고 자신의 꿈을 소년에게 대신 꾸게 하려고 하자, 소년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소년은 아무도 찾지 못할 만한 곳을 지도에서 무작위로 고른 후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도착한 곳에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소년은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말라버린 우물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소년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존재가 아닌 자신은 이대로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죽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배가 고파 오면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 조금씩 뜯어먹었고, 마실 물이 떨어지자 비가 내려 소년을 적셔 주었다. 밤의 어둠과 추위는 소년을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지만, 아침이 오면 해가 솜털을 바짝 세우며 온몸의 생기를 돋아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해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위에서 우물 뚜껑을 덮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소년은 그대로 끝이 없는 어둠에 묻혀 버렸다. 이제 정말 죽는구나 싶었다. 시곗바늘 소리가 우물 안을 가득 메운 탓에 심장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실제로 뛰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다 떨어진 소년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정신이 들었을 땐 자신이 깨어있는 것인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아니, 흐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소년이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정신을 차려보고자 있는 힘을 쏟아붓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냥 그대로 있어. 나를 믿고 벽에 기대 봐. 그럼 벽을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소년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댈 힘조차 없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정어리를 떨어뜨려 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어리 몇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소년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몸을 일으키려 했고, 손으로 땅을 짚는 순간 정어리에 손이 미끄러져 벽을 향해 쓰러졌다. 하지만 벽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무언가 물컹한 느낌이 뺨에 닿았을 뿐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벽을 통과했다. 그곳은 어두웠지만, 차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호텔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년은 몸이 한없이 무거워짐을 느끼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남은 힘을 짜내어 물었다.

“넌 누구지? 어디서 나한테 말을 하는 거야?”

“사람들은 날 까마귀라고 부르지. 하지만 실제로 까마귀는 아니야. 검지도 않고 심지어 날개도 없으니까.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네가 바라는 게 있을 뿐이지.”

“내가?”

“응, 바로 네가.”

“난 그저 터프해지고 싶을 뿐이었어. 이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바랄 수 없게 돼버린 걸.”

“그렇게 돼버렸다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네가 있을 뿐이야.”

“그럴 리 없어. 이건 내가 바란 게 아니야.”

“과연 그럴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내 인생에서 아무것도 없었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어. 이건 내 인생이 아니야. 난 이 세상을 거부하겠어.”

“거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다른 너로 태어나기라도 할까? 다른 너로 태어난다고 하면 과연 그 삶은 지금보다 나은 삶일까? 그땐 뭔가를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아? 넌 다시 태어나도 조금도 다르지 않은 너로 태어날 거야.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뀐다고 해도 넌 너일 뿐이야.”

“그럼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이야?”

“계속 춤을 춰.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발이 멈추면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 다신 방황하지 않고, 다신 이 경계로 넘어오지 않도록 제대로 스텝을 밟으란 말이야. 남보다 멋지게 추는 거야. 모두가 감탄할 만큼. 그뿐이야.”

소년은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힘에 이끌려 몸이 일으켜지더니 저절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스텝을 하나하나 밟아가자 소년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고, 어느새 소년은 열정이 불타는 눈빛을 하고는 땀을 흘리며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소년의 스텝은 점점 호텔방 창문 쪽으로 향했다.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던 소년은, 마치 러너스 하이를 느끼는 듯한 황홀함에 젖은 얼굴을 하고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소년은 떨어지면서도 스텝을 밟았다. 소년은 웃고 있었다. 마치 발이 없는 새가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의미 모를 눈물을 흘리며 까마귀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

“뭐든.”

“그래서 춤을 다 춘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까악, 까악 하고 울렸다. 소년은 중력과 바람과 눈물을 느끼며 낙하했다.


29


핸드폰이 울렸다.

“나 돌아왔어.”라고 그녀가 말했다.

“만날 수 있을까?”

“오늘 시간 돼?”

“물론.”

“잠실 롯데 백화점인데, 5시에 끝나. 괜찮아?”

“5시까지 백화점 앞으로 갈게. 그런데 거기서 뭘 하고 있어?”

“꽃꽂이 수업.”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책을 펴 읽던 챕터를 마저 읽었다. 다 읽었을 때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굵고 강한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잠실역에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쳤지만, 백화점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마도 지하도를 이용하나 보다고 난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정각이었고, 나는 정문에서 20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가로등 밑 재떨이 겸 쓰레기통 앞으로 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와 함께 비내음이 섞여 음산하고 축축한 공기가 폐 속에 겹겹이 쌓였다.

하늘이 아직 개지 않아 어슴푸레한 도로 위엔 차들이 잘 보이지 않는 차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왕좌왕하며 서행하고 있었다.

백화점 쪽으로 몸을 돌리자 큰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 전자회사에서 신학기를 맞이하여 노트북 빅 세일을 한다는 광고였다. 예쁘장한 여학생이 얼굴을 거의 다 덮을 것만 같은 큰 헤드폰을 쓰고 작고 가벼워 보이는 노트북을 옆구리에 낀 채 캠퍼스를 거니는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고가의 노트북과 헤드폰이 대학생용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광고판에 보이는 소녀 모습은 내가 캠퍼스에서 마주쳤던 그녀들과는 사뭇 달랐다.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여학생들보다는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책이 들어가기 벅찬 작은 핸드백만 든 모습의 학생들이 더 익숙했다. 이미지와 실제는 많이 다른 것이다.


그녀가 백화점 정문으로 나온 것은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르게 짧은 단발을 귀 옆에 어느 정도만 남겨둔 채 뒤로 힘껏 모아 엄지손가락 만한 길이로 묶고 있었다. 귀 옆으로 내려진 머리칼이 교묘하게 귀를 가려 한쪽 귓불이 없다는 걸 알 도리는 없었다. 머리 위엔 하얀 머리띠를 했고, 본 적 없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일주일 새 그녀는 광고판 소녀처럼 대학 신입생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얀 반팔 폴로셔츠 플래킷에 있는 가짜 버버리 체크 문양이 눈에 띄었고, 깔맞춤을 한 듯 하얀 미니스커트와 하얀 캔버스화를 신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앞에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청난 비였어.”

“젖진 않았지?”

“응, 실내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내가 죄다 하얘서 신경 쓰여. 어째서 일기예보는 이 정도 비를 예측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뻐.”

“고맙지만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야.” 미간의 주름이 펴지고 뾰로통한 목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그래도 소나기 덕분에 더위가 좀 가셨어.”

“그건 그래.”

우린 천천히 호수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행은 어땠어?”

“사실 여행 같은 건 가지 않았어. 미안해. 거짓말을 했어.”

“이유가 있겠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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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끔은 거짓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던 건 작년이다.

거짓말을 하는 건 상당히 불쾌하다. 사소한 거짓말이나 중대한 거짓말 모두 그렇다. 그렇기에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더 불쾌한 인생을 사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무리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자주 하게 되면 거짓말을 한 사람 자신마저 자신이 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결국 자신조차 자신이 뱉은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러한 힘이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 오해를 사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아는 자신이 아닌 오해로 인해 굴절된 자신으로 보게 만든다. 따라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떤 측면에선 또 다른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럼 대체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어디에나 중용이 있겠지마는, 그 지점은 죽기 전까지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쟁이로 살거나 오해받은 채로 살며 진실을 내 안에만 간직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이란 것은 대체로 주관적이다.


작년 여름, 나와 S는 강원도 한 펜션에서 나란히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었다.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스>였다.

제물로 잡혀온 사내의 머리를 광신도가 잘랐고, 잘린 머리는 피라미드 꼭대기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통, 통, 통 튀며 굴러 떨어졌다. 그녀가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야?”

“믿기 때문이지.”

“대체 뭘?”

“신.”

그녀는 몸을 일으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난 옷을 걸치지 않은 그녀의 작은 가슴을 바라볼 뿐이었다.

“구약에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 신약에선 신이 예수를 희생시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냐.”

“으음...” 그녀가 다시 몸을 뉘어 자신의 등을 내 가슴에 밀착시키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다시 신음 소리를 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난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들이 오가며 얽히고설키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신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신앙을 논하는 사람 중 100%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이다. 신앙이 살아있는 까닭은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이 확신으로만 가득 찬 신앙과 신성은 존재할 수 없다. 그 확실한 예로 예수의 마지막 절규를 들 수 있다.


디오 미오 디오 미오

뽀르 께 메 아반도나스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를 사랑해?”

“사랑해.”

“결혼하고 싶어?”

“응.”

“당장이라도?”

“너만 괜찮다면.”

“...... 아이는? 낳고 싶어?”

“둘 아니면 셋.”

“성별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셋이면 딸 둘 아들 하나.”

“난 싫어.”

“결혼이? 아니면 아이를 낳는 게?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려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몇 초가 흐른 후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짓말쟁이.”

그러나 그녀는 잘못 알고 있었다. 그날 난 한 가지밖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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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수 근처 로컬 호텔 식당에 들어가 파스타와 리소토와 샐러드를 먹었다. 식사를 끝내자 종업원이 접시를 치우며 후식은 뭘 원하는지 물었고, 난 따뜻한 커피를, 그녀는 따뜻한 홍차를 주문했다.

“여행 간다고 하고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녀가 물었다.

“아주 오래전에 사람들은 비밀이 있으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큰 나무에 구멍을 파고 거기에 비밀을 털어놓은 후 흙으로 구멍을 메꿨대. 산이나 나무가 없는 지역 사람들은 돌멩이에게만 비밀을 털어놓은 후 강에 던졌다고 하고. 그럼 그 비밀은 흙으로 메꾸거나 돌을 던진 사람이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 나무와 강바닥에 묻혀 있게 되는 거야. 내 방엔 어항이 하나 있는데 물고기는 없어. 대신 가지각색 돌멩이가 여럿 들어있을 뿐이야.”

그녀는 살짝 웃는 듯하더니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덮고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봤다.

“알겠어.”

나는 커피를 후후 불고 한 모금 마셨다.

“궁금한 게 있어. 왠지 넌 알 거 같아서.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우리는 왜 태어난 걸까. 엄마 아빠가 어쩌고 저쨌네 그런 거 말고. 목적 말이야. 존재의 이유가 있긴 한 걸까?”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영원회귀 관점에서 보면 의미 없는 거지, 사실. 우주는 계속 팽창하니까 우린 그만큼 점점 더 작은 먼지 같은 존재가 되어갈 뿐이고, 그런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하면 우리가 가진 존재 의미는 더 옅어지고 가벼워지겠지.”

“그런데 왜 의미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생명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거야?”

“글쎄... 그게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않을까? 씨를 뿌리고 종족 보존을 한다는 명목 하에.”

“그래봤자 먼지일 뿐이잖아. 그리고 영원회귀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몇 번이나 종말을 맞았으니 지금 이 세상도 결국 멸종으로 이어질 텐데?”

“멸종(extinction)과 본능(instinct)은 한 끗 차이니까.”

그녀와 난 말없이 홍차와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는 내려놓은 잔 속 액체의 미세한 떨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원래 세상에 태어나기 전 기억이 존재하는데, 천사가 아이들을 지상으로 내려보내기 전에 코와 입 사이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기억을 없앤대. 그 자국이 인중이고. 어떻게 생각해?”

“일리 있네.”

“난 다시 태어난다면 기억을 간직한 채 태어나고 싶어.”

“나도 그래.”


우리는 식당을 나와 호숫가를 걸었다. 비 내린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엔 물 비린내가 섞여있었는데, 그 냄새가 오히려 그녀의 샴푸향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내 코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는 마치 바람에 몸을 맡긴 후 누군가를 태우고 훨훨 날아가고 싶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처량한 그네 같아 보였다.

“재취업 생각은 없어?”

“한 달 뒤면 태평양을 건널 거야. 그곳에 일자리를 구했어.”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연말엔 잠시 돌아올 거야. 12월 24일이 엄마 생신이라. 혼자 계시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 다른 생각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이면 슬플 거 같아.”

“넌 언제야?”

“5월. 물고기야. 넌?”

“난 3월. 양이야.”

“네가 없으면 쓸쓸할 것 같아.”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가로등 불빛이 물에 젖은 아스팔트를 반짝이는 밤하늘로 만들었다. 우린 나란히 고개를 숙인 채 땅에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머리띠를 벗고 묶은 머리를 푼 뒤 머리띠와 머리끈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자 그녀가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시트러스향 샴푸향과 베이비파우더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상큼한 따스함을 전해주었다. 난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며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고 땅에 자리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걸었다.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전부 다!”

그녀는 양팔을 오므려 손을 가슴 높이로 올린 후 양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나도?”

“미안, 넌 빼구.”

“꼴도 보기 싫은 정돈 아니라는 거지?”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앙증맞은 주먹을 쥐었던 손을 펴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흩어져서 사라진 것인지 흩어지지 않은 채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혹시 환청 같은 거 들어본 적 있어?”

“없어. 넌?”

“밤에 혼자 잠을 못 자고 있으면 가끔... 온갖 사람들이 내 귀에 대고 경멸하듯 말을 해. 너 같은 건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거나, 불량품이라거나 하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세 모금 가량 피운 담배를 하얀 스니커즈 바닥으로 비벼 끄고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병일까?”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게 병이라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병원 같은 델 가봐야 할까 봐.”

“다른 건 몰라도 잠을 잘 못 자는 건 좋지 않아.”

그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떨리는 손 때문인지 쉽지 않았다.

“이런 얘기하는 거, 네가 처음이야.”

나는 말없이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은 내 손 안에서도 계속 가늘게 떨었다. 우린 그 상태로 계속 천천히 걸었다. 난 이따금씩 잡은 손과 그녀의 옆모습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는 하얀 스니커즈 끝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을 뿐이었다. 마치 잡힌 손에 이끌려 어디로든 가고 싶다는 듯이.

“정말이지... 거짓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어.”

“알아.”

우린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접어든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하늘만 바라봤다. 마치 달 옆에 응당 있어야 할 또 다른 달을 찾듯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그녀 눈에서 나온 한줄기 빛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빛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걸 보니 그녀 의식의 중력이 엄청난 힘으로 빛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그녀 뺨 위에 놓인 빛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문질렀다.


그 해 여름의 향기는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함이었다. 물 비린내, 땅에 펼쳐진 밤하늘, 시트러스와 베이비파우더 향, 그녀의 손과 얼굴과 어깨의 감촉,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던 바람, 알 수 없는 아픔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오래된 꿈... 그것들은 마치 날아갈 듯 날아가지 않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회오리치는 낙엽들처럼 제자리를 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제자리에 있는 것은 나 혼자일지도 모르겠다.


32


우린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 헸다. 그녀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다시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녀는 비를 맞으며 새끼 강아지처럼 신나 했다.

“뭐 해? 뛰어!”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나는 그녀 뒤를 천천히 쫓으며 명랑한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녀 집 현관에 들어서자 그녀가 잠깐만, 하더니 후다닥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 향긋한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수건을 한 장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나는 현관에 서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대충 닦고 손의 물기를 없앴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서자 그녀가 화장실 앞에 우두커니 서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혹시 같이 씻고 싶어?”

“응.”

“미안. 오늘은 안돼.”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양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그 상태로 서있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녀와 내가 번갈아 씻은 후 우린 함께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난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처음부터 알몸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내 오른 다리를 끼워 넣고 나를 안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음모가 허벅지에 느껴지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가슴 언저리에 놓인 그녀 머리에서 온기를 품은 시트러스 향이 올라왔다.

“미안해.”

“뭐가?”

“오늘은 할 수가 없어.”

“괜찮아.”

“다른 거라도...”

“정말 이대로 좋대두.”

그녀는 내 가슴에 더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해.”

“뭐가?”

“상대방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많이 좋아하지 않았나 보지.”

“그럴지도 몰라. 넌?”

난 내가 만났던 세 명의 여자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들은 모두 그 시간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 잡은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기억나.”

“정말 좋아했었나 봐.”

“그럴지도.”

“내가 이상한 걸까?”

“그럴 리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능이 망각이라고 했어.”

“누가 한 말인데?”

“니체.”

그녀는 내 몸통을 두른 팔에 좀 더 힘을 줬다.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온기가 내 몸을 데웠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온기를 잃어가는 듯했다.

“모든 게 뒤틀려 가기만 해. 꽤 오래전부터.”

“언제부턴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빤 대학생 때부터 아팠으니까. 엄마가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내가 태어나던 해에 크게 사기를 당해서 우리 집이 망했고, 그 탓에 아빠 병이 심해져서 우리 집이 더 힘들어진거라구.”

나는 말없이 그녀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슬펐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말을 듣기 전엔 즐거웠는데... 꼭 내가 태어난 걸 탓하는 것 같았거든.”

말을 마친 그녀가 내게 몸을 더 밀착시켰다. 작지만 봉긋한 가슴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맥주가 미치도록 마시고 싶었다.

“그때부터 일거야. 내 주변 공기가 탁해진 게. 왜 그런 거 있잖아. 먹구름이 내 머리 위에 있고, 내가 어딜 가든 나만 따라다니는 그런 느낌.”

“공기도 바람도 결국 다 지나갈 거야. 우주의 이치나 섭리가 그래.”

“정말 그럴까?”

“그럼. 언젠가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황야에 모래를 스치는 바람만 불고 있는 듯한 침묵이었다. 나는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른입과 목이 타들어갔지만, 침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야. 시간 속을 천천히 그리고 유유히 걸어가다 보면 멀어지겠지, 지나가겠지, 흘러가겠지 하는 생각. 하지만 대체 언제일까, 내가 그곳에 도착하는 건...”

그녀의 이 말을 끝으로 우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단단히 감싸 안은 채 건조한 침묵 속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창과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반쯤 잠이 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니...”

그녀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33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내가 멈춰있거나 천천히 가면 영영 닿지 않으리라 생각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짐을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지만 큰 이민가방 두 개가 꽉 찬 것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버리지 못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미련인 것만 같았다. 대충 정리를 마무리하고 웬즈데이 바에 들렀다. 아직 문을 열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G는 나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곤 맥주와 땅콩을 줬다.

“내일 아침이면 인천 가는 공항버스를 타고 있을 거예요.”

G는 카운터 안쪽에서 하이 체어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깍지 낀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영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가는구먼. 이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이젠 누가 바늘 없는 시계를 바라봐주려나.” G가 자기 뒤에 서있는 시계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양은 또 어떻고. 그 친구도 틀림없이 서운해할 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거긴 재밌을까?”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요?”

“그럼 똑같이 지루하겠군.”

“새로운 웬즈데이를 찾아봐야죠. 수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G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 입에서 뺀 후 바닥에 재를 털었다.

“분명 있을 거야. 난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여길 떠난 적이 없어놔서 잘 모르지만.”

G가 일본인이라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도 나보다 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인이라는 것이.

“하지만 몇 년쯤 후엔 가게를 닫고서라도 일본엘 가보고 싶어. 가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럴 거야. 너처럼 해외로 가는 사람을 보거나 하늘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게 되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여기가 좋아서 여태 가지 않은 거예요?”

G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다 거기서 거기겠지.”

“우리 둘째 큰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가셨어요.”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서 죽지. 하지만 어디에 있건, 살았든 죽었든, 어떤 식으로든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해. 지극히 개인적으론 말이야.”


G는 대화 이후에도 세 차례나 맥주를 더 갖다 줬고, 쥐포 튀김도 산더미처럼 대접했다.

“고마웠어요, 정말.”

“시제가 별로야.”

“고마워요.”

“나야말로. 그나저나 정말 눈감짝할 새에 어른이 되는 군. 자네를 처음 만난 것이 대학생 때니까.”

“글쎄요. 나이랑 어른은 별개 아니던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작별 인사를 했다.

“건강 잘 챙기고. 천천히 가라고. 물 많이 마시면서.”

“맥주 말고요? 하하하.” 우린 마주 보며 한껏 웃었다.


10월 9일, 이라는 가게 달력 날짜 밑에 이런 격언이 적혀 있었다.

‘살아있는 계란이 죽어있는 바위를 부순다.’


이튿날 아침,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사님이 무겁고 큰 이민가방 두 개를 끙끙거리며 버스 밑 짐칸에 싣는 걸 지켜본 후 짤막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기사님이 버스에 오른 후 나도 따라 버스에 올라 내가 예약한 좌석을 찾아 앉았다. 난 버스나 비행기나 상관없이 창가 좌석을 좋아한다. 한강을 따라 달리는 버스 창 너머로 빛이 한강 수면에 부딪혀 반사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든 존재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의 기척을 느끼며 불어나는 물방울처럼 나아간다. 그리고 바다에 닿아 우주에 버금가는 대양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물방울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34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끝이 나는데,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뒷 이야기가 있다.

나와 양은 서른여섯이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다. 웬즈데이 바는 재개발된 지역에 맞게 좀 더 세련된 술집으로 변했다. G는 2층을 인수해 일본식 선술집으로 개조했고, 당연하게도 ‘수이요비 이자카야’라는 간판을 달았다. G는 위층과 아래층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음악과 맥주와 안주를 신경 쓰고 있고, 단골들은 넓어진 가게 앞 도로와 풍경이 예전 감성이 아니라고 투덜대면서도 맥주를 맛있게 마시고 있다.

나는 올초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겨울에 결혼을 해서 서울 한 귀퉁이에 살고 있다.

아내와 나는 아이를 낳지 않고 딩크족으로 살기로 했고, 자코 반 도르말과 왕가위 감독의 새 영화가 나오길 기다리며 옛 영화들을 돌려보고, 아내가 만든 맛있는 안주와 함께 맥주 그리고 가끔은 데낄라를 마시며 옛 노래들을 따라 부른다. 두 감독의 영화 중에서 난 <미스터 노바디>와 <중경삼림>을 좋아하는 반면, 아내는 <토토의 천국>과 <화양연화>를 꼽는다. 좋아하는 노래도 다르다. 난 박효신의 <눈의 꽃>을 좋아하고, 아내는 나카시마 미카의 원곡 <유키노 하나>를 더 좋아한다. 같으면서 다른 우린 서로를 사랑한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행복도 어쩔 수 없이 무용지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양은 아직까지도 계속 소설을 쓰고 있다. 그는 완성된 작품이 있는 해엔 우리 엄마 생신에 맞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복사본을 보내온다. 작품이 나오지 않은 해엔 아무것도 보내오지 않는다. 작년엔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 나섰다가 기억을 잃고 고양이 말을 할 줄 알게 되는 백발의 노신사 이야기를 썼고, 재작년엔 화성에 갔다가 우물에 빠져 죽다 살아난 개 이야기를 썼다. 변함없이 그의 소설엔 섹스 장면이 없고, 단 한 명의 등장인물도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나에게 보낸 복사본 첫 페이지엔 언제나,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님.


하고 쓰여 있었다. 왜 직접 우리 엄마에게 보내지 않고 나에게 보내는지는 의문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한쪽 귓불이 없는, 배꼽 언저리에 물고기자리 문양이 있던, 책은 못 읽지만 책을 좋아했던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내가 그녀와 한 약속대로 한국을 떠났던 해 연말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꽃집도 그만두고 살던 집에서도 이사 가고 없었다. 흘러 흘러 바다로 나아갔는지, 이미 증발해 버렸는지, 다시 물방울이 되어 어딘가에 떨어져 흐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주 가끔 웬즈데이 바를 찾을 때면 맥주를 마신 후 취기를 달래며 그녀와 함께 걸었던 호수와 거리와 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호숫가에 멍하니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를 바라보곤 한다. 누군가 그랬다. 정작 울고 싶을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어떤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선인장은 내가 한국을 떠났을 때도 나 대신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 선인장 때문인지 엄마는 여러 종류의 다육이를 기르는 취미를 갖게 되셨다. 그리고 엄마 덕분에 그 선인장이 꽃을 피웠다. 엄마 집에 갈 때면 난 <선인장>을 틀어놓고 선인장을 바라보면서 <선인장>을 흥얼거리며 맥주를 마신다.

선인장 선반 옆엔 어항이 있고, 내 비밀을 간직한 돌멩이들은 여전히 말이 없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넥스트의 새 앨범을 기다리기는 어렵게 되었다. 내가 한국을 떠난 이듬해에 신해철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이 가슴을 쿵쿵쿵 두드리더니 빼꼼 열린 내 가슴속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행복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이다.


35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구로키 아키라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아키라는 1954년 아오모리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다. 아버지는 과묵한 산림 보호사였고, 어머니는 텃밭을 가꾸며 국숫집을 운영하는 약간 통통한 여자였다. 순수하지만 어두웠던 소년 아키라에게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그는 시간만 나면 만화책이나 청소년 문학만을 읽었으며,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했다. 졸업 후엔 아버지가 다니는 국립공원에 목수로 취직했지만 워낙 손재주가 없고 근력이 부족해 일찌감치 그만두었고, 그 무렵부터 자신이 나아갈 길은 창작자, 즉 소설가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아키라 소설은 이중 삼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도저히 어떤 장르인지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며, 그의 작품들 중 그나마 대중적으로 읽혔다고 할 수 있는 <계산사 히로> 시리즈는 그의 최대 히트작으로 12편이나 된다. 그 안에서 히로는 우물에 12번 빠지고, 24명의 보스급 빌런을 죽였으며, 20명의 히로걸과 썸을 탔고, 총 46명의 인질 또는 포로를 구출했다. 그중 몇 편은 우리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

아키라는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세상을 증오하고 사람을 극도로 피해서 출판사와도 편지나 쪽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출판사의 편지나 쪽지를 받으면 원고지에 OK 또는 KO(OK를 거꾸로 써서 거절의 뜻을 밝힌 듯하다.)를 큼지막하게 써서 자신의 집 대문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반면 그가 좋아한 것도 있기는 있었는데, 딱 세 가지였다. 위스키와 정어리와 어머니가 만든 국수다. 그는 모르긴 몰라도 당시 일본에 내로라하는 애주가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위스키 수집가였을 것이다. 커티 삭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워낙 커티 삭을 좋아해서 이름의 유래가 된 시를 쓴 스코틀랜드의 국민 시인 로버트 번스의 유해를 찾겠다고 스코틀랜드로 넘어가 3년을 헤매고 다녔으며, 결국 찾지 못하자 잉글랜드로 넘어가 동명의 클리퍼선을 자신이 사서 일본까지 타고 돌아가겠다고 생떼를 부린 사건도 유명하다. 결국 그는 박물관에서 위스키 병 안에 ‘커티 삭’ 클리퍼 선 모형이 들어 있는 기념품을 사서 돌아오는 것에 그쳤고, 그 기념품을 자신의 집 거실 한가운데에 정성스레 모셔두고는 늘 그 기념품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위스키를 마셨다.

그러다 1999년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아키라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건너가서 커티 삭 유리병 기념품을 안고 아이리시해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묘비에는 유언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혔다.


구로키 아키라

작가 그리고 애주가

1954~1999

적어도 끝까지 어른이 되고자 애썼다.


이 묘비명은 곧 내 좌우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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