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필사이거나 습작이거나

by 박이운

아키라, 오 아키라……


구로키 아키라라는 작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설 따윈 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내가 글을 써나간 그 방향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없이 원망했던 아버지였지만, 돌아가신 후 당신의 서재에서 아키라의 책을 발견했다는 것에는 감사를 전할 수밖에 없다. 싸구려 갱지에 싸구려 잉크로 인쇄한 아주 저렴한 문고본이었던 터라 행여나 찢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고, 밑줄 하나 긋지 않았다.


난 몇 년 전에 스코틀랜드에 다녀왔다. 오로지 아키라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한 짧은 여행이었다. 무덤이 있는 곳은 펜팔을 통해 알게 된 구로키 아키라 일본 팬클럽 회장인 하라 카즈토 씨가 이메일로 가르쳐줬다.

그는 메일에 이렇게 썼다. “무덤은 밥공기를 엎어놓은 모양인데 그 크기가 어릴 때 만들던 두꺼비 집만큼이나 조그맣고, 묘비는 집 대문 옆에 걸어 놓은 명패 크기밖에 되지 않으니 눈을 크게 뜨고 찾으셔야 합니다.”

글래스고우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에어까지 간 뒤 기차역 근처에서 차를 빌려 포트패트릭에 도착한 건 아침 여섯 시였다. 이 작은 해변가 마을의 아침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나는 선착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바닷바람을 힘껏 들이마셔 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릿한 바다내음과 함께 시트러스 향과 베이비파우더 향이 느껴졌다. 5분 정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선착장 옆 식당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곤 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도착해 커피와 풀 스코티시 브렉퍼스트를 시켜 먹었다. 이 아침 메뉴는 말 그대로 풀 패키지와 같아서 양이 어마어마했는데, 잠을 자지 않고 이곳까지 온 탓에 허기가 졌는지 커피와 함께 접시를 싹 비웠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 부부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내게 다가와 커피를 리필해 주었다. 나는 아주 맛있었다고 감사 인사를 하곤 묘지의 위치를 물었다.

묘지는 마을에서 30분가량 떨어진 절벽 위 초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보다도 넓은 묘지였다. 묘지에 올라 바라본 마을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내 머리 위에선 갈매기 몇 마리가 빙글빙글 날고 있었다.

아키라의 무덤을 찾는 데는 묘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에어 기차역에서 산 에린지움 한 다발을 무덤 앞에 가지런히 놓고 무덤을 향해 합장했다. 가져온 커티 삭은 뚜껑을 열어 무덤에 세 번 휘이 휘이 뿌리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꽃다발 옆에 놔두었다. 그리고 묘비의 먼지를 쓸고 그 앞에 앉아 묘비명을 몇 번씩이나 읽으며 가슴 한편에 새긴 후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곳의 10월 날씨는 겨울만큼이나 차가웠지만, 난 옷깃을 여미고 담배를 문 채 몇 시간 동안이나 질리지 않고 새들과 함께 바닷바람을 맞았다.

이 소설은 그런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디로 나아갔으며 어디에 도달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질서하면서도 계속 팽창하는 우주와 비교하면 우리가 하는 창작 따윈 멸치똥과 같은 것이다”라고 아키라는 말했다.

나는 이 소설이 멸치똥이라도 되길 바라고 있다.


아키라의 인터뷰 내용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하라 카즈토 씨의 역작 <전설과 함께 가라앉은 전설>(2009)에서 몇 군데 인용했음을 밝힌다. 감사드린다.



2025년 10월

박 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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