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츠비 Jun 17. 2023

[기러기의 일기 14]

세상 끝의 카페

어릴 땐 그저 흔히 말하는 금수저들이 부러웠다. 금수저가 아니더라도 빚에 허덕이는 우리 집보다 좀 더 나은 형편에 있는 친구들 집을 보면서 열등감에 휩싸였고 우울했다. 열심히 쫓아가보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뭔가 하나를 이루면 그들은 이미 둘, 셋을 이루고 있었다. 군 제대 후 더 급격히 기운 가계 탓에 알바를 해 돈을 번다며 휴학을 길게 해서 남들보다 늦은 스물여덟에 졸업과 취직을 한 난, 취준생 시절 연체된 핸드폰 요금 탓에 불량해진 내 신용 점수를 메우기 바빴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바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과 차를 가진 비슷한 또래의 선후배나 친구들의 여유로움을 보며 좌절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30대에 접어들었고,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져만 갔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서, 10년 뒤 내 모습이 우리 팀장의 모습일까 두려워서 운 좋게 입사한 대기업을 뛰쳐나와 해외로 이직했을 때만 해도 열 살 남짓 위인 새 회사의 상사들이 외제차를 타고, 좋은 동네 좋은 집에 살고, 아이들을 비싼 국제학교에 보내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성공을 조금 더 앞당기고, 남들에 비해 뒤처져 있는 내가 남들과 비슷한 선상에 서게 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10년을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결국 내 노력과 고생이, 장거리 연애와 기러기 결혼 생활을 하며 버텨온 모든 것들이 다 그들의 주머니와 배를 채워주는 일임을 깨달았다. 난 그들이 타는 좋은 외제차, 그들이 사는 고급 맨션, 그들의 자녀가 다니는 비싼 국제학교에 들어가는 비용을 벌어다 주는 부속품일 뿐이었다. 처음 이직했을 때 봤던 상사들의 나이가 된 지금의 난 여전히 당시에 그들이 누리고 있던 것들을 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그런 것들을 누리고 사는 것에 도움만 주고 있었다. 현타가 왔다.


마흔이 된 지금 내 삶을 돌아보면 그랬다. 눈앞의 것만 쫓다 보니, 남들 속도에 맞춰 살려고만 하다 보니 허우적댈 뿐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계속 비교만 하기 바빴다. 나 자신, 내 인생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꿈이 없었다. 쳇바퀴 도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랬던 내가 변했다. 더는 남들 기준에 맞춰 살지 않는다. 남들 속도에 맞춰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남들의 말보다 내 내면에 귀울기울인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내 속도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은 아내의 유산이었다. 기러기 생활을 하는 것도 싫었지만, 어렵게 생긴 아이를 아내가 유산했을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 삶에 어떤 것이 소중한지 알게 되었고, 그 한을 연료 삼아 마흔이라는 나이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자 하는 새 여정을 시작했다.


존 스트레레키(John Strelecky)의 책 '세상 끝의 카페'에서 존이 들른 카페의 종업원 케이시가 존에게 들려주는 녹색 바다거북 이야기가 있다. 하와이 해변에서 스노클링을 하던 케이시는 녹색 바다거북을 만난다. 케이시는 아주 느리게 헤엄치는 거북이를 계속 뒤쫓아갔지만, 아무리 빠르게 물살을 갈라도 천천히 여유롭게 헤엄치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결국 거북이는 케이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며칠 뒤 케이시는 다시 한번 녹색 바다 거북이를 만났고, 이번에는 거북이가 어떻게 헤엄치는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거북이는 파도가 밀려올 때는 헤엄을 치지 않았고, 파도가 다시 밀려 나갈 때 물살에 맞춰 헤엄을 쳤다. 케이시는 깨달았다. 물살이 밀려오던 밀려나가던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해 헤엄치려고만 했던 자신이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를.


케이시와 녹색 바다 거북이 이야기를 통해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어떻게 헤엄쳐야 내가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알게 된 것 같다. 난 여태껏 계속 밀려드는 파도와 물살을 이겨내려고 온 힘을 다해 헤엄쳤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한 것이다. 무작정 열심히 산 결과가 지금 내 인생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거북이처럼 스스로의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작정 빠르게만 가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남들을 따라잡으려고 있는 힘없는 힘 모두 쥐어짜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 속도에 맞춰서, 삶이라는 파도와 물살에 맞춰서 헤엄치면 더 빠르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삶, 간절히 바라는 삶, 내 꿈과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기러기의 일기 1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