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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츠비 Jun 04. 2023

[기러기의 일기 13]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

요즘엔 하도 하고있는 것들이 많아서 평일은 당연하고 주말에도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 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만큼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틀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면 그건 나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는 바로 운영 중인 영화 블로그에 포스팅이 되고, 이렇게 기러기의 일기 소재가 된다. 두 시간 동안 내 눈을 스크린에서 떼지 못하게, 내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지 못하게 만든 이번 영화는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라는 일본 영화다.




이 영화는 실화다. 우울증에 걸린 남편 미키오와 그런 남편을 동반자(츠레)라고 부르는 아내 하루코가 그려가는 우울증 극복기이면서 한 부부의 성장기다. 만화가인 하루코는 우울증에 걸린 남편 미키오로 하여금 강제로 사표를 던지게 한 후 자신이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떤 만화를 그려야 하나 고민했고, 출판사 편집자와 편집자의 선배를 통해 얻은 아이디어를 통해 매일 한컷 그림일기로 그리고 있던 자신과 남편의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만화책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영화화까지 된 것이다.


원작 만화 호소카와 텐텐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표지




우울증의 증상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각 개인마다 다르기 마련인데, 미키오의 증상은 두통, 불면증, 등 통증, 무기력증 등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병원을 다니며 우울증 치료를 받을 땐 불면증이 왔다가도 하루종일 잠을 자는 시기가 찾아오기도 하고, 또 갑자기 우울증에서 다 회복한 것처럼 기분이 좋은 시기가 왔다가 다시 깊고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미키오가 콜센터로 출퇴근을 하면서 고객으로부터 시달리고 번아웃 비슷한 과정과 증상을 겪는 장면에서는 내가 과거에 나 스스로 번아웃 증후군이 왔다고 느꼈을 정도로 심하게 번아웃을 겪었을 때와 비슷해서 너무 공감이 됐다. 나도 아마 그 시절에 정신과를 방문해 상담을 받았다면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았을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루코와 미키오는 우울증을 극복해나가기도 했지만, 둘 모두 각자의 성장, 부부로써의 성장을 이룬다. 우울증을 극복한 미키오도 미키오지만, 미키오가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을 준 하루코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많은 성장을 이뤄가는 모습이 너무 애틋하고 장했다. 남편이 우울증임을 숨겨오던 하루코가 더 이상 그 사실을 창피해하면서 숨기지 않고 출판사 편집자에게, 또 결혼 동기 (같은 교회에서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부부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이는 동창회의 동기)에게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장면, 특히 자신의 만화를 받아주지 않던 편집자에게 남편이 우울증에 걸려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한다며 부탁드린다고 큰 소리로 외치던 하루코의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장면이다. 골동품을 좋아하는 하루코가 골동품점에 들러 유리병을 사면서 골동품점 주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이 안에 든 공기는 100년도 넘은 공기겠네요.'

'마음에 드나?'

'그럼요.'

'평범한 유리병일뿐이지만, 안 깨졌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있게 된 거지.'

'안 깨졌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있게 됐다... 안 깨졌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거였어!'


그렇다. 우울증에 걸리고 번아웃이 오면 스스로 가치가 없는 사람,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가치가 없을 수가 없다. 깨지지 않고 삶을 살아내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버텨내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은 가치가 있으니까.




2년 만에 교회 결혼식 동창회를 찾은 미키오와 하루코 부부는 사람들 앞에서 우울증에 대해 고백하고, 특히 하루코는 남편의 우울증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그리고 내 눈시울을 붉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풍족할 때나 가난할 때나 이 남자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껴주고 이 남자에게 힘이 되겠습니까?'


흔한 결혼 서약서 내용이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진심 가득한 서약의 말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다.




오늘도 기러기는 아내 생각으로 힘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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