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만나는 논어 - 황영훈
지은이는 황영훈 안과 의사이다. 안과 전문의로 펠로우, 교수, 봉직의를 하면서 느낀 인생의 각 시기들을 논어에 빗대어 풀어놓았다. 이전에도 여러 번 논어를 시도했지만 딱딱한 문체와 출판사마다 다른 해석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개인의 경험에 빗대어 풀이한 논어 문구는 읽기가 한결 쉬웠다. 또한 같은 의사 직군에서 사유한 글은 구구절절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그 환자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환자가 그 병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 윌리엄 오슬러
최근에 직장이나 학교를 옮겼다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큰 수술을 받았다거나, 굳이 억지로 알아낼 필요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소식은 환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어 치료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 빠른 진료를 위해선 객관적인 사실만 중요하다. 피검사 결과와 영상결과, 그리고 질병과 관련된 환자의 히스토리 몇 가지면 진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끔씩 의도치 않게 알게 되는 환자들의 개인사는 의학적인 답을 내리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곧 결혼할 딸이 있는 60대 남성에게 수술과 항암의 경계가 애매한 순간, 단순히 병기와 간의 상태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어떤 병인지보다 어떤 환자가 그 병을 가졌는지 아는 과정은 더 진료시간을 연장시키지만, 환자에게 더 최선의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준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이 받드는 것은 내가 걸친 관과 띠를 받드는 것이고
내가 낮은 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은 내가 걸친 베옷과 짚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본래 나의 모습을 받드는 것이 아니니 기뻐할 것도 없고
본래 나의 모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니 화낼 필요도 없다.
- 명예와 돈을 추구하고, 차와 옷을 중시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다. 타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변을 초월해 조금 더 흔들림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중심을 본인에 두는 것이다. 본연의 모습을 본인이 알고, 만족한다면 세상과 시간에 휩쓸릴 일도 줄어든다. 남과 비교하기보다 어제의 나와 비교하고, 안분지족을 이뤄나갈 수 있길.
항상 의미 있는 일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신없는 진료실에서 의미를 떠올릴 여유가 부족할 수도 있고 상황이 너무 단순하고 명확해서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땐 억지로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그저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의미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 글도 마찬가지였다. 의미가 있는 순간만 기록하려다 보면 글이 써지는 순간은 한없이 뒤로 밀렸다. 대신 소재가 없더라도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의미가 생겨났다. 내게 이런 생각이 있었는지 글을 통해 알게 되곤 놀란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비단 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든 일에 이유와 의미가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많은 일들은 유지되지 못했거나, 지금만큼의 진전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분야이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상대적으로 뛰어난 재능이나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확률이 높은 집단에서 기죽지 않고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논문 잘 쓰고, 발표 잘하고, 수술 잘하고, 멋진 외모에, 사교성 좋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학회 모임에 다녀오면 열등감에 빠져 의기소침해지곤 했습니다.
- 매번 학회를 갈 때마다 느끼는 바였다. 의대 시절에는 주변만 둘러봐도 잘난 친구들이 많았다. 의사 집단뿐만 아니라 어느 집단에서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많았다. 모든 분야에 1등이 아닌 이상,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남과 비교하기보다 어제와 나와 비교하고, 나만의 가치를 굳건히 세워야 한다. “타인과 잘 지내기 위해선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말은 언뜻 역설처럼 들리지만, 결국 자존감의 기반이 되어주는 진리였다. 학회에서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도, 지금은 나의 속도에 집중하며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에서 느껴지는 작가는 학문에 대한 열망이 상당한 분이었다. 더불어 본인의 업과 삶에 대한 자세도 진지했다. 아마 내가 앞으로 해나갈 고민들을 먼저 한 분일 수도 있다. 선배 의사이자 인생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선배로 자연스레 응원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누군가의 진심이 느껴지면 그 사람의 행운을 빌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가 보다. 삶과 진료, 글쓰기를 모두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배의 진심이 책에 녹아 있었다. 덕분에 나와 내 주변의 삶도 멈추어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단단한 하루를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