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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축소판, 양재천

by 글쓰는 외과의사

하루 중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양재천으로 간다. 새벽이나 한밤중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양재천을 거닌다. 양재천은 세 개의 층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가장 아래층은 양재천 바로 옆으로 이어진 트랙으로 자전거 길과 러닝을 하는 사람들의 길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층은 대개 산책하는 사람들이 오간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도, 심지어는 꼭두새벽에도 사람들이 있다. 양재천은 도심 사람들의 숨을 불어넣어 주는 장소 중 하나다.


길게 이어진 양재천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아빠와 함께 나온 꼬마부터 전동 휠체어를 타는 할머니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러너들의 자세도 제각각이다. 상체를 한껏 들고뛰시는 아주머니와 한쪽 다리는 절뚝이며 뛰는 할아버지도 있다. 전력 질주를 하는 중학생과, 큼지막한 헤드셋을 끼고 여유롭게 뛰는 아저씨도 있다. 10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뛰고 나면 사람 구경을 한가득 안고 돌아온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과 풍경을 과거엔 알지 못했다. 러닝을 한 지 벌써 10년 차. 기록을 중요시하던 예전엔 누구도 나를 앞질러 가면 안 되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앞지른 경우 끝까지 뒤를 따라가며 혼자만의 경쟁을 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뛰고 나서야 제대로 운동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러닝을 하고 있다. 산책인지 산보인지 헷갈릴 정도의 러닝을 하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간다. 작년 한 해 내내 이어진 부상에 지금은 단지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 시기가 찾아왔다. 걷다가 뛰다가, 조금이라도 무리가 오면 언제든 벤치에 앉아 쉬었다.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며 뛰기만 했던 본인이 이제는 걷는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엔 내게 이런 시기가 올지 상상도 못 했다.


양재천 러닝은 인생사를 보여준다. 삶이 그러하듯 모두가 각자의 속도가 있다. 빠르던 사람이 느려지기도 하고, 느리게 뛰던 사람이 전력 질주를 하는 날도 온다. 사람의 속도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라, 시기의 차이일 뿐 항상 빠른 사람만 있을 수 없듯 항상 느린 사람만 있을 수도 없다. 대개 사람들은 빠른 속도를 우선시하지만 결코 느린 속도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 느리게 뛰며 둘러보는 주변은 훨씬 더 많은 장면과 사색을 안겨준다. 운동이 끝나고 회복기에 근 성장이 이뤄지듯, 오히려 성장이 일어나는 시기는 느린 걸음이 필요한 순간일 수 있다. 각자의 인생사와 그 굴곡에 어쩔 수 없이 맞춰지는 '속도'는 우쭐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는 개념이다.


회복은 기다림이 아니라 과정이다. 느린 걸음 속에서도 근육은 자라고, 오히려 마음 근육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인생이란 마라톤을 호되게 완주 중이다. 가끔이 끝이 있긴 한 건지 의문스럽지만 묵묵함으로 버티다 보면 러너스 하이에 도달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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