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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빈부격차

by 글쓰는 외과의사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는 대학병원에서 논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해마다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지만, 한 편의 논문이 나오기까지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걸린다.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며, 통계를 돌리고 결과를 해석한 뒤 글과 표, 그림으로 풀어내야 비로소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완성된 논문을 아무 저널에서나 받아주지 않는다. 해당 저널에 실을 수 있을지 평가받는 과정에서 새로운 통계를 돌려야 할 수도, 논문의 일부를 다르게 써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간을 합치면 짧으면 몇 개월, 길면 2-3년도 걸린다. 논문을 읽는 법도 몰랐던 전공의 시절을 지나, 논문을 쓰고 있는 지금 돌이켜 보면 그동안 지나친 수많은 논문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논문이란 내겐 마치 업(業) 같은 개념이다. 업(業)은 불교적 의미로, 피할 수 없고 짊어져야 하는 삶의 과업이란 의미다. 전문가가 되려면 언제까지나 타인의 지식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내 분야에 깊이를 더하는 새로운 발견과 실험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다만 그 과정의 일환인 논문은 앞서 말했듯 결코 만만치 않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결과를 확인하는 것에 흥미를 느낄 때도 있지만, 아직은 그 과정에 수반되는 괴로움이 더 크다. 괴롭지만 참고해야 하는 업(業) 중에 하나인 셈이다.


최근 이 괴로움을 줄여주는 도구가 생성형 AI다. ChatGPT나 Gemini 같은 생성형 AI는 논문 작성의 효율뿐 아니라 연구자의 창의력까지 확장시켜준다. AI가 나오기 전 선배들은 과연 어떻게 논문을 써왔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연구 아이디어부터 데이터 정리, 통계, 표와 그림까지 기대 이상의 도움을 준다. 잘만 활용하면 연구의 괴로움을 줄이고 반대로 흥미를 높여줄 수도 있다.


다른 연구자들은 어떻게 AI를 활용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알게 된 세미나가 '임상 연구 방법론 워크샵'이었다. 워크샵에는 의사만 참가한 게 아니었다. 인공지능 학과에서 수업하시는 교수님들도 오셨다. 강의는 본인들의 각 분야에서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계시는지, 어떤 모델들이 연구에 도움이 되는지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신선하고 놀라웠다. 처음 보는 생성형 AI들이 너무 많았고, 각각의 활용도 또한 상당했다. 2022년 11월 30일 챗지피티가 처음 출시되고 만 3년이 지난 지금 시점, 챗지피티를 능가하는 모델들이 단기간에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그동안 이러한 AI 모델들을 써보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다. 5시간이 채 안 되는 반나절 동안 9개의 강의를 들으며 처음의 신선함은 서서히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지식의 빈부격차"



경제적 빈부격차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AI의 발전은 지식의 간극을 한껏 벌리고 있었다. 전문가가 AI를 잘 활용하기 시작하면 그 지식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반면,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지식은 정체된 듯 보였다. AI를 더욱 자주 접하고 친숙하게 알아가야 하는 이유가 명확했다.


주변을 보면 아직도 구독료를 내고 Chat GPT를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다. 단순 검색 기능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달 검색료 29000원은 아까운 돈이다. 하지만 Chat GPT의 생산성과 창의성을 이해하고 지식과 사유의 확장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내야하는 돈이다. 강연을 하시던 한 교수님은 생성형 AI 구독료만 한 달에 200만 원이 넘어갔다. “대학원생 열 명을 데리고 일하는 기분”이라며 보여주신 연구 슬라이드는, 마치 다른 세계의 산물처럼 느껴졌다.


AI의 발전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무한해졌다. 하지만 단순히 읽기만 해선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세미나의 끝 무렵 한 교수님은 AI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글"을 강조했다. 정보를 글로 옮기고,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며, 문장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지식은 나의 것이 된다.


인간은 늘 도구를 만들어 스스로의 한계를 넓혀왔다. 불이 생존의 도구였다면, AI는 사유의 도구다. 처음엔 낯섬과 두려움이 먼저지만, 결국 그 두려움은 변화의 예고였다. 이 흐름을 거부하기보다, 그 위에 올라타야 한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사고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확장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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