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일본광고 카피도감 - 오하림

우리는 훌륭한 과거가 될 수 있을까?

by 글쓰는 외과의사


일본광고 카피도감- 오하림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03-15_%EC%98%A4%ED%9B%84_9.19.56.png?type=w1


안 주고 안 받는 게 맘 편한 것들 중 하나가 선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생각은 더 공고해졌었고,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카카오톡 기프티콘도 점차 유통기한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 책 선물은 '책'의 내용과 별개로 '선물'에 대한 개념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상대방의 취향을 고민하다 직접 포장해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이었다. 상대를 아끼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만큼 은은한 방법이 또 있을까.


'일본광고 카피도감'. 평소 서점에서 봤다면 펼쳐보지도 않았을 책이었다. 일본 광고 문구를 궁금해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책 속의 광고 문구들은 생각보다 큰 울림을 주었고, 무엇보다 작가의 시야를 넓히는 해석은 저절로 본인의 삶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선물로 받지 않았더라면 주옥같은 문구들을 몇 년은 더 지난 뒤에야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산은 정상을 보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발끝을 보고 오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지만 언제 닿을지 모르는 막연함을 좇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야겠습니다.


등산과 마라톤, 인생의 공통점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란 점이다. 끝이 있긴 한 걸까란 물음을 수백 번쯤은 마주하는 긴 여정이다. 등산처럼 산의 정상, 마라톤의 42.195km처럼 목표지점 있는 경우는 그래도 한결 낫다. 인생이란 개념은 목표지점이 어딘지 간혹 잃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막연한 먼 미래를 보기보다, 발끝을 보고 지금을 살아가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겠다.



"쉬지 않으면, 쉬게 된다." - <라쿠텐 트래블 온라인 여행 플랫폼>

쉼이란 여유가 있을 때 챙기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늘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바쁨을 미덕으로 여겼다. 일과 일 사이에 잠깐 주어지는 시간조차 무언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과 사람을 만나고, 주어진 임무가 있는 것 마냥 할 일을 다하고 나서야 쉴 수 있는 줄 알았다. 어떻게 쉬는 것이 나를 충전하는 방법인지 사실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과 사회생활, 운동처럼 '쉼'도 의식적으로 챙겨야 하는 개념임은 확실하다. '쉬지 않으면 쉬게 된다.'는 섬뜩한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들은 훌륭한 과거가 될 수 있을까?" - <산토리 주류기업>

우리는 언젠가 과거가 될 겁니다. 늘 스스로 미래라고 생각해 왔지만요. 미래는 늘 다음이 있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가 될 거라면, 훌륭한 과거가 되어야겠죠. 좋은 미래를 만들어준다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개인적으로 어쩐지 로맨틱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미래라고 했다면 언젠가는 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지지만, 과거라고 하니 지금 노력해야 하는 일처럼 와닿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광고 문구였다. 사람은 모두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다만 어떤 과거가 될지는 제각각 다르다. '어차피 과거가 될 거라면, 훌륭한 과거가 되어야겠다.'는 작가의 말을 듣고 나면 마치 나의 과거를 내가 선택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불확실함을 떠안으며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나의 과거를 내가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의 전환은 현재의 삶을 나의 주도권으로 가져오는 듯하다.



"바다와 산에게 격려를 받는다. 어른이란 그런 것일지도." - <돗토리현 관광포스터>

가끔 답해주지 않는 것이 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선배의 조언이나 친구와의 밤샘 대화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정리될 때가 있죠.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치는 달에서 위안 받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처럼, 어른이란 조용히 많은 감정을 처리할 수 있는 대인(大人)일 수도 있겠다.



"한 번의 여름, 평생의 기억" - <제93회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 홍보 포스터>

무언가를 끝까지 사랑했던 기억은 평생을 살며 아무도 가질 수 없는 큰 무기입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하고 비효율적이기도,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 것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쓰면서 마음의 끝까지 갔던 길은 모두 내 땅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무언가에 빠지다 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다른 새로운 도전을 할 때 마음의 허들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내가 그것까지 했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으로요. 무엇을 해도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러니 무모한 사랑은 인생의 중요한 스펙이지요.


하루를 쳇바퀴처럼 지내다 보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덜컥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 이벤트가 찾아오면 그제야 삶의 방향성과 현재의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 가에 대한 물음은 내가 어디에 열정을 쏟아왔는가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열정 가득했던 삶은, 삶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후회 없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대담함을 주기도 한다.


최근 보았던 유튜브 한림예고 체육대회 영상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열정 가득한 학생들의 무대는 반대로 나의 세상을 비추었다. 나의 세상을 가득 채울만한 열정을 투자하는 대상이 있었을까. 삶의 유한성을 느끼는 순간에, 나는 어디에 열정을 쏟아야 할까.



"등을 밀어준 것은 그때 도망가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칼로리 메이트 영양 조정 식품>

그런 장난 같은 말이 있죠. "내일의 나에게 맡겨야지." 언제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과거 혹은 미래의 자신을 마치 타인으로 인식할 때가 있는 듯합니다. 지금의 행복에 집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장난이겠지만, 가끔은 정말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타인 같기도 합니다. 끊어낼 수 없는 타자 같기도 한 과거의 자신이 지금 노력하는 나의 등을 밀어주는, 연결된 존재가 된다.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카피는 읽는 사람에게 그 누구보다 든든한 나 자신이라는 아군을 만들어줍니다. 나를 칭찬하는 것도 나, 나를 응원하는 것도 나, 나아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내가 되는 것이죠.


과거, 현재, 미래의 자신은 모두 제각기 다른 인물이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타인으로 인식하면 힘겨운 삶을 함께 살아가는 든든한 아군이 되기도 한다. 순식간에 삶의 동반자를 구할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은 유지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을 뿐이다.



"당신의 건강은 누군가의 기쁨입니다." - <해바라기 생명보험>

해바라기 생명보험의 캠페인은 건강이라는 개념을 신체적 상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함께 풍요롭게 만드는 경험으로 확장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건강을 주변인들의 행복으로 인식한다면,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이 나의 건강이었다. 타인을 챙기고 걱정하기에 앞서 나부터 건강한 것이 먼저일 수도 있겠다.




책에 실린 광고 문구들은 모두 발상의 전환으로, 삶의 전환을 떠올리게끔 했다.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참신한 광고가 되는 것처럼,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https://youtu.be/f7CsEqkyrZQ?si=IBV09zFlwLVpYAGZ





매거진의 이전글51. 당신의 말이 곧 당신의 수준이다 - 비트겐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