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보고서는 창작의 고통이라 하지 않던가
보고서를 쓰며 며칠간 자정을 넘겨 퇴근하다 보면 근원적인 질문에 다다른다.
그런데 이걸 내가 왜 작성하고 있지?
이런 경우가 있었다
윗분(이라고 쓰고 결정권자 또는 그 위의 어떤 분들이라고 읽는다)에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가 떨어진다.
하.. 이게 아닌데...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래 하라면 해야지...라는 찝찝함을 안고 보고서를 만든다.
수정과 번복, 추가와 삭제를 반복한 끝에 보고서를 완성.
이제 보고하고 끝내자. 어차피 내 의사가 반영되는 보고서가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보고서를 보신 분들께서 질문을 하시는 것이다.
이거 왜 하는 건데? 이거 맞아? 검토해봤어? (응? 하라고 해서 한 건데???)
그리하여 이번엔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대기업 보고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지난 연재에 다루었던 관리 주의와 보고문화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다.
보고서와 기획서는 기본적으로 다르지만 대기업에서는 어차피 다 보고서다.
기획은 기획보고, 진행은 진행보고, 결과는 결과보고, 문제 있으면 개선보고,
언제 시작할지 모르면 추진보고, 급하면 긴급보고, 조금 느리면 지연보고.
화룡점정으로 이것들을 통합해서 보고 상황을 종류별 비교해서 보여주는 관리보고.
보고란 무엇인가? 우리의 초록 친구 네이버에 보고를 검색하면 아래처럼 나온다.
일에 관한 내용이나 결과를 말이나 글로 알리는 것이고 그것을 문서로 만든 게 보고서이다.
굉장히 사전적이다. 북한어가 등재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브런치를 연재하며 대기업병 시리즈를 생각하게 되었고 두 번째 주제는 "보고(서)"가 아니었다.
"집단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를 두 번째 주제로 이야기할 계획이었지만
지난 몇 달간 나와 내 선임을 죽어라 괴롭힌 보고서를 보며 주제를 바꾸게 된 것이다.
일단 아래 화면부터 보고 가자.
내가 마치 이 글을 읽는 독자의 PC를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인가.
대외비 문서여서 "대기업병_보고서"로 파일명을 바꾸기만 했을 뿐 실제 나의 특정 보고서 폴더를
거의 그대로 베껴온 거다. 나의 선임께서는 이를 보고 창작의 고통이라고 하셨다.
보고라는 것은 보고를 받는 사람에게 정보를 알리고 의사결정이나 의견을 듣기 위해
보고서라는 것은 가독성을 높이고 이를 문서로 남겨
후에도 볼 수 있는 자료이자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왜 일을 위해 보고를 하는 게 아니라 보고를 위해 일을 하게 되었나
보고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 국그릇은 하난데 입맛이 다 달라
본격 폴더에 보고서 파일이 버전만 바뀌어 아메바처럼 증식하는 원인이다.
편하게 본부장님부터 시작하자. 무엇인가가 알고 싶으셔서 지시를 내리셨는데
나에게 바로 오지 않는다. 보통 규모가 있는 대기업에서는 아래 단계를 거친다.
본부장님→사업부장님→실장님→팀장님→중간관리자→실무자
.
여러 단계를 거칠수록 최초의 지시가 변질되고 해석이 변화되는 과정이 보이는가?
본부장님은 나에게 공중부양을 주문하셨는데
나는 본부장님을 포인트왕으로 만들어드리겠다는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
팀장님께 보고서를 가져간다. 이 바보야! "보지 마" 보고서를 만들라니까!
어? 포인트왕이 되고 싶으신 게 아니었어? 투닥투닥 몇 번의 수정을 거치고서야 통과했다.
실장님께 보고서를 가져간다. 이 바보야! "공주병"보고서를 만들라니까!
으잉? "보지마"가 아니라 공주병이었어? 투닥투닥 몇 번의 수정을 거치고서야 통과했다.
사업부장님께 보고서를 가져간다. 이 바보야! "공중부양"보고서를 만들라니까!
먼 소리야 이건 또? 공주병이 아니셨어? 투닥투닥 몇 번의 수정을 거치고서야 통과했다.
김치찌개를 끓이는 사람은 실무자 한 사람이지만
문제는 상에 올리기까지 거치는 단계마다의 한 숟가락 간 보기가
누군가는 고기가 적으니 햄을 넣으라 하고
누군가는 양이 부족하니 라면도 넣으라 하고
누군가는 맛이 약하니 김치를 넣으라 한다.
어느샌가 김치찌개가 부대찌개가 되어 있다.
어느 한쪽이 위고 아래라는 관점이 아닌 직급에 대한 예우를 갖춘 상황에서
충분히 소통이 이루어지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좀 나았을까.
모르면 물어보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실력과 눈치가 없는 사람처럼 비춰진 것일까.
상급자일수록 위의 상급자에게 묻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그 부족한 부분을
대비하기 위해 수많은 똑딱이 들이 한 장의 보고서에 가득 담긴다.
그렇게 한 두 달이 훌쩍 지나가버리면 흐지부지 되었다가 언젠가 보물 찾기처럼
발굴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인적자원들이 장기미결이라는 업무들로 허덕이게 된다.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나라다.
왜 유일한 자원을 소모적인 일에 사용하는가
직급/상명하복/소통 부재 등의 이유로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자원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재들을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보고서 작성으로 인해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자신을 활용하는 것에 불만은 갖는 것이 아니다.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일에 반복적으로 자신이 활용되는 것에 불만은 갖는 것이다.
OOO님 관심사항 / OOO님 문의사항
당신이 무거운 책을 여러 권 들고 낑낑대며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이 책 중요해하면서 맨 위에 얹어놓고 급하니까 빨리 하란다.
OOO님 관심사항은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맨 위로 올라오는 업무다.
회사를 위해 반드시 검토되고 보고되어야 하는 사항인지
어라? 생각해보니 잠깐 궁금하니 간단하게 답변만 들으면 되는 사항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혹시 모르니 덜 혼날 수 있는 방향으로 필요 이상으로 준비하게 된다.
출출한데?
한마디에 간식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진수성찬을 올리는 낭비를 한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보고서 작성자의 동기를 완전히 말소해 버리는 데에 문제가 있다.
왜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것
관심사항이 이유라고? 동기부여가 전혀 안된다.
모든 직장인은 가치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면 효율이 오르기 마련이다.
사회초년생부터 "이 일을 왜 하는지 생각하고 일해"라고 주구장창 배우지만
진짜 모르겠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사전에 예측 불가하여 업무상황과 개인의 스케줄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
오늘 보고서 다 끝내고 집에 일찍 들어가기로 했는데... 오늘 보고할게 산머디 같았는데...
실무자에겐 사실 전부 중요한 보고서다.
물론 중요도는 다를지언정 기한 내 못 맞추면 욕먹는 건 매한가지다.
유교문화인지, 집단주의가 강한 탓인지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을 직장을 위해 개인의 무언가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데 익숙하다. 그러한 애사심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쁘다고는 생각 않는다.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직원들의 월급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기에 회사가 성장해왔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만큼의 배려도 필요한 것이다.
모두 매달라 있는 수건 같다.
쥐어짠다고 더 나오는 것이 윤택한 여분의 기름인가
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무엇인가
모든 실무자는 늘 합당하고 합리적인 일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경영층에서 관심 있어 하는 사항을 실무자가 조사하고 정리하는 것도 이해한다
소모적인 보고서 작성은 지치지만 왜 소모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는
직원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이 된다.
선생님께 몰매를 맞는 것도 힘들지만 왜 맞는지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찌 보면 가장 쉬운 인사관리 기법이 아닐까
당신이 이 일을 왜 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줍니다.
그러니 간단하게 구두로 진행상황을 설명해주고 필요하다면 보고서를 요청하겠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사무실에서 위의 두 문장을 듣는데 또는 입 밖으로 내뱉는데 익숙하다면
회사는 1년 뒤에도 성장하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10년 뒤에도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보고서는 역시 PPT가 아니겠는가
보고서가 되는 순간 우리는 PPT를 켜야하는데 이 PPT에는 무서운 법칙들이 있다.
먼저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자.
탕비실에 믹스커피가 맛있어서 자주 먹었다. 그러다 보니 믹스커피가 부족해진 거다.
앞으로는 1주일에 한 통이 아닌 2통을 놓으면 해결이다. 정말 끝이다. 간단하다.
이를 피피티로 만들어보자. (만들면서도 스스로가 참...)
- 내가 쓸 말은 몇 개 없는데 무조건 다 채워야 한다
이럴 때 대략 난감하다. 꾀나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커피통 하나 더 추가해서 놓으면 되는 것을
배경이며 문제점도 한 3개 정도는 만들어야 되고 향후 추진계획까지 써야 한다.
이를 전문성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저 시간 낭비다.
억지로 공간을 채우다 보면 커피가 부족해
실무자의 업무 의지 약화
업무 효율 저하
회사 경쟁력 약화
와 같은 상식을 벗어나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닌 이상한 문구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 누구 한 명이 보고하면 다들 그 양식으로 해야만 한다.
이 [11층 커피 재고 부족 관련 보고서]는 결제가 난 순간 모든 재고관련 보고서의 기준이 된다.
창의적인 인재를 원하지만 조금이라도 틀에 벗어나면 왜 틀에 벗어나야 했는지를
또다시 보고해야 한다. 그럴 바엔 그냥 양식을 통일하는 게 속 편한 것은 사실이다.
- 숫자 하나하나 디테일해야 하지만 책임 부문은 애매하게 써야 한다.
위의 피피티를 보자. 교묘하게 마지막에는 "11층 담당자 확정 후"라는 문장을 표기함으로써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님을 은근히 표현했다. 실제로 회사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 똑같은 말인데 단어 하나에 수십 번씩 수정된다.
중간 문단에 보면 사용량 과다라는 표현이 보이는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썼지만
실무에서는 어떨까? 사용량 과다라고 하면 우리 조직이 평균 대비 너무 많이 써서
우리의 잘못인 것처럼 보인다면서 수정해야 할 문구다.
현재 주당 재고 대비 사용량 과다로 부족분 발생 → 우리 조직이 많이 사용한 문제
현재 주당 사용량 대비 1주당 재고 부족분 발생 → 총무팀이 애초에 부족하게 배분한 문제
조삼모사다. 같은 의미에 앞으로 할 일도 같은데 수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직간의 명분이고 책임전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 한 달 전엔 무사통과한 양식이 오늘은 이상하다고 피드백받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분명 수십 번의 다듬질을 통해 완성되었던 보고서가 지난 몇 개월간 잘만
통과되어 왔다. 그런데 오늘은 양식이 이러면 보고받는 자가 보기 어려우므로 바꿔야 한다.
패션만큼이나 보고서 트렌드도 바뀌는 것 같다.
신규 양식으로 바꾸어 잘 사용하다가도 과거의 양식을 또 찾기도 한다.
마치 뿔테 안경과 백팩처럼 복고라고 무시당했던 아이템이 다시 대세가 되는 듯하다.
과연 우리가 효과적인 보고를 위해 PPT를 TOOL로서 이용하는가
PPT 작성을 위해 보고서 내용을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보고 내용 : PPT = 책 : 책장
읽은 책을 책장에 넣는 것이지. 책장을 채우기 책을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PPT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다.
마치며
우리나라는 대기업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된다.
보고와 보고서는 업무의 중요한 핵심 요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기계처럼 작성하고
똑같은 내용을 말만 바꾸어 수십 번을 수정하고
내용이 아닌 형식에 얽매여 시간을 허비하고
현장이나 실제 능력이 아닌 숫자와 글자로만 일을 하고
불필요한 보고를 줄이기 위한 보고서가 필요한 모순에 갇히고
답이 정해진 보고서를 단지 합당해 보이도록 만들기만 하고
간단히 메일로 한두 줄이면 될 보고를 PPT로 만들고
우리는 왜 그러고 있는 것일까.
스티브 잡스가 최초로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이폰을 만들면서
가장 훌륭한 디자인은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것이다
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한 보고서는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보고서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이 나라의 직장인들과 취준생들이 많은 불합리와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단순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지인들과 이런 문화를 개선하고자 한다.
그 첫 단계로 모든 회사와 직무, 업무환경에 대한 정보의 벽이 가능한 선까지 양질의 정보로
공개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멀지 않은 시기에 그러한 서비스를 오픈할 생각이다.
PS : 댓글을 많이 남겨주시면 좋구용. gzerof@gmail.com로 속풀이 이야기나 직장생활이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것도 자유롭게 남겨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직이나 취준생입장에서 이런 정보가 공유되거나 고려되면 좋을텐데 하는 요소나 의견도 많이 말해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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