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관리의 늪에 빠진 대기업
일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이 업무를 왜 하고 있는 건지
시키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요청을 하는 건지
그냥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과정이 많은지
저번에 했는데 왜 또 말만 바꿔서 요청하는지
제발 중요 업무 좀 집중해서 하고 싶은데 놔둘 수 없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다 "대기업병"이라는 단어로 이 사태를 표현해보고자 한다.
한 번에 끝내기엔 너무나 아쉬운 소재. 시리즈물로 나가보자.
(2004년에 국립국어원에 등록되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놓치지 말자.)
대기업이 병에 걸렸다. 바로 대기업병에 걸렸다.
대기업병이 무엇인가를 말하자면 걸렸다 하면 아래 같은 증상을 보인다.
전문 조사기관에 나와서 면밀히 분석한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그냥 내가 그리고 동료가 느끼는 일상이다.
당연하게도 해당하는 개수가 많아질수록 말기 환자다. 법인이 말이다.
이 중에서도 오늘은 대기업병의 1번 주자인 관리 주의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실 관리부서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 논란의 여지는 없다.
중구난방으로 총질을 해대다가는 엉뚱한 사람이 맞거나 필요할 때 총알이 바닥나 버린다.
누구를 조준할지, 어떻게 접근할지, 이번엔 한 발 뒤로 물러날지 나아갈지를
정하는 HEAD가 있어야 하고 전방부대가 뛰어들어야 하는 법이다.
왜 관리의 늪에 빠졌나?
최근에 "왜 우리는 집단에서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을 보고 나름 납득 가능한 이론이 있어 소개해보면
초기의 기업 시스템은 효율성을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핸리포드가 컨베어벨트를 도입해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성공시킨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이 혁신으로 기업을 이끌고 싶었고 그 결과는 숫자나 지수로 증명되어야 했다.
시간 대비 생산 대수 등이 그 근거가 되었고 곧 숫자=효율이라는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 첨언하자면 이 숫자를 관리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관리의 중요성도 비대해지고
무엇이든 관리하고 컨트롤하면서 자위라도 하듯 경영층도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이라 생각된다.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전적으로 관리부서가 실무를 서포트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위에도 언급했듯 관리 부서의 힘이 프론트 부서보다 강해지면서
대기업은 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관리의 관리를 위한 관리에 의한
동료가 해준 얘기가 있는데 답답하면서도 현실과 닮아서 더욱 씁쓸하다.
눈 앞에 모기가 돌아다녀서 파리채로 잡았다. 그리고는 평온히 잠을 잤다. 매우 심플하다.
이 심플한 행위도 관리의 늪에 빠지면 아래처럼 변한다
1. 갑작스레 모기가 보인다. 왜 보이는지? 누가 보냈는지? 파악하란다. (그냥 잡고 싶은데..)
2. 규정을 찾아보니 모기에 대한 대처법은 있는데 갑작스러운 모기에 대한 대처법은 없다.(뭔 차이냐?)
3. 회의를 열어 누가 모기를 퇴치해야 하는지 의논한다. (모기가 미쳐 날뛰고 있다고!!!)
4. 일단 저 모기는 내가 퇴치할 모기가 아님을 입증하려 한다. (어? 이게 아...아닌...)
5. 3번의 회의 끝에 과거 유사 사례를 내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업무로 확정이다. (그냥 잡으면 안 되나)
6. 이제 모기를 잡고 싶은데 파리채를 쓸지, 손으로 잡을지, 스프레이를 뿌릴지 보고하란다. (이것들이...)
7. 심지어 각 퇴치법의 예상 효과를 분석하란다. (셋 다 모기 죽이는 건데...)
8. 우여곡절 끝에 가격 대비 효과가 빠른 스프레이를 선택. 윗분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 (하아... 지친다)
9. 유관부서에 공유될 수 있도록 내가 며칠/몇 시에 잡을지 협조 메일을 보낸다. (모기 도망간다 이놈들아..)
10. 1초 만에 잡음. 드디어 잡았다!!!!!!! (이 간단한걸 한 달이나 준비하다니!!!!!!)
11.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내 업무는 모기를 잡는 것 까지다.(응? 끝이 아니야?)
12. 모기를 치우는 건 누가 할지 정해야 한단다. (응?? 그냥 쓱 치우면 될 것 같은데...)
13. 쉽게 주관부서가 정해지지 않아 일단 모기는 그 자리에 놔둔 채 장기미결 업무가 되었다. (아놔.. )
14. 핵 결정타로 매달 모기 시체 처리 안건이 나올 때마다 히스토리를 정리해 관리부서에 바쳐야 한다.
관리를 위한 관리를 하게 되면
빠르게 대처해서 간단히 해결할 일이 커져버린다.
무엇보다 결과물에 비해 들어가는 공수가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심지어 실무담당자는 업무에 대한 동기부여가 바닥이 나고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지쳐버린다.
관리의 늪에 빠져버리면
단기적으로는 그냥 일이 성가셔지고 효율이 떨어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고 직원들의 사기가 바닥이 나서 곪아버리게 된다.
분명 목적은 문제의 해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텐데
쉽게도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다.
관리는 Management다. Control이 아니다
실무진보다 관리자가 많다
매우 상태가 심각한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간단하게 당신이 오늘 하루 500 접시의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큰 규모의 레스토랑에서 일한다고 하자.
직원이 100명이다. 좋다 한 사람당 5 접시씩 만들어 좋은 퀄리티로 승부해주자.
생각해보니 요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테이블 셋팅과 손님 접대 등도 필요하니 40명이 빠진다.
이제 60명이다. 혹시라도 재료를 놓치면? 순서가 틀리면? 주니어 관리자로 요리사들을 관리하자.
이제 40명이다. 주니어 관리자가 20명인데 얘네들이 통일된 기준으로 잘 하나? 시니어 관리자가 필요하다.
이제 30명이다. 요리마다 관리체계가 달라야 한단다. 5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종합 관리자를 두자.
이제 25명이다. 5개의 그룹을 비교해서 종합 보고 해야 하지 않겠나? 마스터 관리자여...
이제 23명이다. 휴 이제 요리를 하자. 어라... 맞다. 실무 중에 신입이 3명이지.
이제 20명이다. 어느새 한 사람당 25 접시씩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단순히 생산해야 하는 요리의 개수가 많아지는 게 아니라
내 위에 포진한 관리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보고하란다.
그러다 보니 음식의 질이 떨어지고 / 후배를 못 챙겨주어서 후배 3명이 너무 힘들어한다.
갑자기 두둥하고 관리자가 이건 관리자의 업무다! 하서 등장한다.
음식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후배를 어떻게 챙겨서 잘 성장시킬지
보고하란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MAIN업무의 경쟁력이 곧 그 회사의 경쟁력이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를 잘 만들어야 하고, 레스토랑은 요리를 잘 만들어야 한다.
이 기본이 갖춰진 상태에서 마케팅도 하고 서비스도 하고 고객의 만족도도 평가되어야 한다.
핵심 상품을 잘 만들어서 성공하는 기업은 봤지만
관리를 잘해서 성공했다는 기업은 들어본 적도 없다
관리자가 실무 경험이 없다
절망에 가깝다고 표현해도 좋다. 절망의 눈 한가운데 있는 기업에서 당신이 일한다고 보면 된다.
운전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도로교통법을 만든다.
라면 하나 끓여본 적 없지만 좋은 요리를 만드는 비법서를 출간한다.
모태 솔로이지만 5년 사귄 친구가 힘들어해서 연애 코치를 해준다(나랑은 정말 무관하다)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방향성이 나올 리 만무하다.
더더욱 받아들이는 사람이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0%이다.
설상가상으로 실무진에서 관리를 돕지 않게 되고 관리직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더욱 많은 관리 프로세스를 만들게 된다.
상황은 악화되고 결국 양쪽 다 적이 되어버리고 지쳐버린다.
그렇다고 무조건 실무부터 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절대 법칙을 내세울 수는 없다.
실무도 해보고 관리도 해본다면 장기적으로 조직에 도움이 되는 역량을 가진 인재가 될 것이다.
순서에는 답이 없다.
다만, 실무랑 동떨어진 관리에 빠져버린 채 고착화되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마치며
실무가 좀 더 좁고 깊이 있게 업무를 한다면 관리는 넓고 멀리 그리고 얕게 해야 한다.
이 둘이 시너지를 잘 내면 조직이 막강해지고 기업의 MAIN 경쟁력도 강해진다.
억지로 표현해보면 악어와 악어새랄까
실무가 미시경제라면 관리는 거시경제다.
경제를 이끌어갈 사람이라면
국가 GDP는 어느 수준인지
물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주택 공급가를 어떻게 관리할지
출산율은 왜 낮아지는지를
보고 정책을 펴서 이끌어야 하는 게 맞다.
다만, 그 거시적 함정/숫자의 함정에 빠져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GDP 이전에 상위 20%와 하위 80%의 격차가 심해지지는 않는지
물가상승률 이전에 쌀값, 라면값이 부담되지는 않은지
주택 가격 이전에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매매가가 아닌 월세에 허덕이는지
출산율 저하 이전에 정작 결혼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지
기업이 국가라면 실무진은 국민(노예)이다.
정부가 게임산업을 대하듯 무조건 관리하고 분석하고 하나하나 따지려고만 하면 안 된다. 그리고서는 IT, 게임산업에 또 창조경제를 말한다.
관리가 스타크래프트 하듯 무조건 실무를 관리하고 분석하고 하나하나 따지려고만 하면 안 된다.
(우린 SCV라고 멍청이들아! 그냥 알아서 미네랄 캐도록 좀 냅둬! SCV컨트롤에 하나하나 집중하면 진다고!!!)
그리고서는 MAIN 업무가 왜 또 지연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지연되었으니 해결하면 되지만 어떻게
해결할지를 또 일일이 보고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불이 났으면 불부터 끄는게 맞지 않은가
불을 어떻게 끌지를 묻고는 다급한 듯 쪼고만 있다면 불은 계속 커진다.
불이 났을 경우를 대비한 메뉴얼을 미리 만들어 조속히 대응토록 판을 짜는게 관리의 역할이다.
16번의 작은 발걸음이면 올라간 한 층의 계단을
160개의 작은 계단으로 나누는게 관리인가
8번의 큰 발걸음으로 올라가게 돕는게 관리인가
경쟁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놓치지 말자. 실무의 행동력이다.
관리는 기업의 핵심능력이 될 수 있는가?
절대 아니라고 본다.
보험업 같은 특정 업종에는 맞을지도 모르겠다.
직원들이 왜 일을 하는가? 돈을 벌려고? 맞다. 매우 맞다.
기업이 왜 직원을 뽑아 일을 시키는가?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일을 하고 해결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다.
관리는 Management다. Control이 아니다
관리는 Supporter다. Commander가 아니다
대기업병은 비단 대기업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조금이라도 즐겁게 일하고 제대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글이 아닐지언정 많이 공유되어서
잘못된 점은 좀 고쳐보자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좋을 것 같다.
대기업병은 인터뷰를 통해 많은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얻고 있다.
조직 이기주의나 무한대의 보고, 온-오프라인 2중 보고 같은 이야기도 자세히 써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