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뒤의 사람들
그 회사는 환자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제약사였습니다. 환자지원과 그 과정을 실무로 연결해 주는 구조였죠. 매출 라인을 쭉 따라가다 보니, 회계기준상 ‘본인(Principal)·대리인(Agent)’ 판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총액/순액(본인/대리인)이슈는 어느회사나 흔하게 발생하는 이슈이지만 그 회사는 해당 매출이 꽤 컸기 때문에 결론에 따라 매출이 크게 줄 수도 있고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 도 있는 꽤 무거운 사안이었습니다.
회사 쪽은 고민이 깊었습니다. “이 프로젝트, 수수료가 거의 없어요. 만약 순액 인식하면 매출이 확 줄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회계기준상 총액으로 할 수 있는 여지는 크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들은 한 마디가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소아암 아이가 이 지원프로그램 덕분에 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부모님이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래요.”
본인·대리인 이슈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통제하고 위험을 부담하면 본인(매출을 총액 인식), 남의 거래를 ‘중개’만 하면 대리인(수수료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판단을 위한 여러 기준이 있습니다. 가격을 누가 정하나? 반품·클레임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재고·신용 위험을 누가 지나? 고객과의 법적 관계는 누구와 맺어져 있나? 등등 여러 사항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회사에 가격 결정 권한도, 최종 책임도 없는 쪽에 더 가까웠죠. 그래서 저는 대리인으로—순액 인식이 회계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매출은 줄었지만, 사실이 왜곡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결론을 뒤집었습니다. 대리인—순액이 아니라 본인—총액으로요. 단지 매출을 유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약의 실질을 다시 설계·확인한 끝에 회사가 이 서비스에 대한 통제를 이전에 보유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죠.
핵심은 ‘누가 서비스의 주인인가’였습니다. 회사가 환자 자격심사 기준과 한도를 정책 범위 안에서 독자적으로 설정하고, 클레임·오류 발생 시 재집행 책임을 1차로 부담하며, 제3자를 직접 선정·지시한다는 사실이 계약서와 운영 매뉴얼로 재정비됐습니다. 더 나아가 회사는 환자에게 선지급 의무를 지고 미회수 위험을 우선 부담하며, 수수료가 패키지 서비스 가격으로 책정되도록 구조를 바꿨습니다. 이는 ‘주요이행책임·가격재량·재고/용량 위험’이라는 본인 판단의 기준과 맞추었습니다.
회계는 단순히 숫자만 맞추는게 아닙니다. 본질을 보고. 재무제표가 미치는 영향이 경영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단순히 순액으로 조정할 수 도 있었지만, 왜곡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총액 인식은 프로젝트를 유지하게 하여 앞으로 더 많은 환자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입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단순히 숫자만 맞춘다는 매너리즘에 빠졌었는데, 그날만큼은 모니터 뒤에 숨어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