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걸 느끼는 건 생각보다 더 단순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감동을 나누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예술작품의 목적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작품을 마주한 순간 마음에 찾아오는 직관이 그 시대의 장르, 작자에 대한 깊은 배경지식 못지않게 중요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은 내게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았다. 대학시절, 한 전공 교수님이 여가 시간에 브람스의 교향곡을 듣는다고 심심치 않게 말씀하셨다. '예술문화산책'이라는 과목에 마침 걸맞은 수업소재였던만큼 교수님은 늘 브람스를 언급하셨고 어느 날은 수업 내내 교향곡을 틀어놓고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셨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그중 끝까지 맨 정신으로 브람스 곡의 깊이를 감상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클래식에 아는 것이 없었던 그때, 전공이 아닌 교양 시간에 클래식을 즐겁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을 보면서 나중에 한 번쯤 제대로 즐겨봐야겠다고 머나먼 다짐을 세웠었다. 가끔은 대단치 못한 우연한 일이 오히려 끝까지 마음 한편에 남아 먼 훗날이라도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음악만의 고유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음악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렇다고 침묵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말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관념을 조합해 입 밖으로 낸다. 그러기 위해선 사유, 즉 생각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진 공항 입국심사를 하듯 몇 차례 통과의례를 거친다. 힘들다거나 지친다거나 부정적인 기운을 풍기는 말을 할 때 특히 더 그렇다. 각자에겐 각자의 짐이 있기 마련이라며 마음에 무던히 툭 담아둔다. 말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각자의 과제를 감당해나가는 것이 성숙한 사회인이 함양해야 할 가장 첫 번째 덕목이라고 스스로에게 되새기면서 말이다.
클래식 음악이 '넘기에 거대한 산'과 같았던 마음의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준 건 음악은 이런 묘연의 과정 없이 마음에 찾아온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최근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를 이어 서예가 일을 하고 있는 출연자 인터뷰를 보았다. 출연자의 서예가 아버지는 "서예는 산이고 캘리그래피는 꽃이다."라고 출연자에게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무작정 "산 타러 가자"라고 하면 부담스러워 지레 겁먹을 수 있어도 "꽃 보러 가자"하면 꽃 보러 간 김에 자연스럽게 산을 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감성은 어떤 면에선 취약하고 여리다고 볼 수 있지만 때론 묵직한 무언가의 물꼬를 틀 때 적절한 처방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음악은 불현듯 마음에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이것이 나에겐 클래식이란 산을 넘어보자 마음을 먹게 한 꽃놀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음악을 듣다 툭 마음이 약해질 때나 눈물이 날 때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지나치게 감상에 젖었다며 곧장 그 감상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도 더러 있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침묵할 수 없는 걸 표현한다는 빅토르 위고의 표현이 정확하다 느낀다. 인간만이 가진 심미안은 예술을 통해 일상의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선율을 잠잠히 들으면서 묻어두었던 마음의 이상향도 그려보고 되새겨보면서 순수함을 마주한다.
혼자 있을 때 자주 듣는 캐논 변주곡이 내게 그랬다.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을 듣고 있으면 시원한 숲길에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쌓고 쌓아두었던 마음속 감정의 발코니를 환기시키는 기분이다. 그 장르나 곡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다 할지라도 늘 저 깊숙하게 마음에서 위로받는다. 이것을 현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싶어도 유감스럽게 자격미달이다. 분명한 것은 풍부하면서도 단순한 그 선율이 매 순간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영혼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피아노로도 바이올린으로도, 하프나 심지어 일렉 기타로도 캐논 변주곡은 특유의 따사로움을 변함없이 전해준다. 단순함 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준다. 좋은 책이 내 마음과 기분에 따라 같은 내용이어도 냄새와 맛이 늘 달리 하는 것처럼 좋은 음악 역시 그런 것 같다.
캐논의 4분의 4박자 코드로 사용된 현대 곡들도 많다고 하는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백지영의 '사랑 안 해',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등이 그렇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D%97%AC%EB%B2%A8%EC%9D%98_%EC%B9%B4%EB%85%BC)
이 곡들 역시 따뜻한 율무차처럼 소박하면서 위로가 되는 곡들이다. 원래 즐겨 듣던 음악들인데 찾아보면서 한번 더 반가웠다. 코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머리론 몰라도 귀로 이런 곡들을 편해하고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퍽 신기하기도 했다.
클래식에 대해 깊게 더 공부하고 싶다는 결심이 서게 되면 그땐 책이 되었든, 문화센터가 되었든 공부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걸 즐기는 데 있어서 한계를 긋거나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는 자기 검열은 내 내면에 허기만 줄 뿐 그 어떤 면에서도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느낀다.
어젯밤 피아노를 10년 넘게 전공한 친한 지인과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피아노와 클래식을 마음 깊이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지인은 피아노를 치는 것도 클래식을 감상하는 것도 두려워했다. 즐기기 전에 연습부터 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그 어투엔 그럴 수 없는 지금에 대한 무거운 아쉬움이 깃들어있었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볼 때, 심미안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에 우린 자주 과하게 경직되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풀밭에 피어있는 꽃을 보며 싱그러움을 느끼듯 다양한 순간 속에서 자유로움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단순하고 쉬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