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의 인연에 대한 짧은 단상
갖가지 책들이 빽빽이 들어찬 책꽂이가 벽의 절반을 차지했고, 책꽂이 위로도 천장까지 책들이 들쭉날쭉 쌓여 있었다. 방바닥에도 책 무더기가 기어 올라가야 할 만큼 높이 쌓여 있었으며, 창문 옆에 서 있는 책기둥들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만약 누군가가 거기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 한 권을 힘껏 잡아 뽑는다면, 그 사람의 발 밑에 문학의 새 파동이 일어났으리라. 쏟아져 내린 책들 틈에서, 그 사람은 새로이 눈에 띄는 책에 끌려 자신이 맨 처음 뽑았던 책을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엘리너 파전 <작은 책방> 작가의 말 중
역할 인연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역할 인연을 만나면, 그 인연을 통해 내 삶에 좀 더 명확한 이정표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리더십 있고 남을 잘 이끄는 성향의 연인을 만났다가 끊임없이 싸우고 헤어진 후에 '나는 부드럽고 유한 사람이 맞는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경우, 역할 인연이라고 칭할 수 있겠죠. 그렇게 보면 역할 인연은 그 인연을 만난 당시가 아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비로소 정립되는 것 같습니다. 음악과 예술 작품에 조예가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유독 편하고 즐거웠다면 그 사람도 역할 인연인 것입니다. 내가 예술적인 감성을 주제로 한 대화를 좋아한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처럼 역할 인연은 주로 사람을 의미하지만, 저는 책을 통해서도 그 인연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흔히 책 속의 세상, 책의 세계라는 말을 많이 하죠. 책을 통해 만나는 세상은 현실과 다른 차원으로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동화 작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의 상인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너 파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작가가 이처럼 풍부한 상상력과 재치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작은 책방에서 다양한 세상을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작은 책방은 나에게 마법의 창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그 창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다른 세계, 다른 시대를 보았다. 그것은 시와 산문, 사실과 환상의 세계였다. 거기에는 옛 희곡과 역사극, 기사들의 모험담이 있고, 미신, 전설, 그리고 '문학의 골동품'으로 평가되는 작품들도 있었다.
엘리너 파전 <작은 책방> 작가의 말 중
역할 인연이 되는 소중한 책을 만나셨나요? 만일 만나셨다면 정말 잘 된 일이고, 만나지 못하셨다면 앞으로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려있으니 더 반가운 소식입니다. 제게 인연이 된 책은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였습니다. 두 책 다 시리즈가 연달아 있는 책이어서 그때 당시 얼마나 기뻤는지요. 그렇게 읽고 또 읽으면서 12살 적 처음으로(제 기억에 의하면) 작가가 열어둔 세상을 둘러보고 책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도서관학 법칙을 정리한 랑가나단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Every reader his or her book. Every book its reader."
모든 독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책이 있고 모든 책은 그 책을 필요로 하는 독자가 있다는 말인데요. 책의 창고인 도서관도 이런 전제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죠.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홈짐을 꿈꾸는 사람은 각종 웨이트 서적류와 건강 다이어트 식단 책이 그 발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난생처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초보 부모님들에겐 잘 나온 육아 서적 한 권으로도 나를 위한 첫 책 상차림이 될 수도 있겠죠.
음식도 먹어봐야 그 맛을 분별하는 것처럼 책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집을 찾으면 이 동네 저 동네 소문 내보고도 싶은 것처럼 낯설게 책에 대해 떠들고 싶어 지는 일이 생길 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