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일이고
돌이켜보면, 이 여행의 심상치 않은 조짐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7월의 마지막날, 티웨이 항공에서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을 통보했을 때.
홍콩 졸업여행은 3월부터 시작한 5개월 간의 준비를 끝내고, 2학기 개강과 동시에 시작될 출발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여름방학의 쉼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티웨이에서 알림톡이 도착했다. 항공 스케줄이 변경되어 대체스케줄이 적용되었다는 알림이었다.
- 변경 전: 2024년 9월 2일 인천-홍콩 09:00 ~ 12:15 / 9월 6일 홍콩-인천 13:15 ~ 18:05
- 변경 후: 2024년 9월 2일 인천-홍콩 22:35 ~ 01:15(+1) / 9월 6일 홍콩-인천 02:40 ~ 07:30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여행을 한 달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우리는 3월부터 이 여행을 준비했고, 4월에 티켓팅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항공 스케줄 변경이라니. 게다가 약간의 일정 조정으로 가능한 범위도 아니었다.
홍콩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뿐더러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기도 어려운 시간대였다. 항공권 가격이 더 비싼 걸 감수하고 좋은 시간대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변경된 스케줄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황당했지만 항공사의 일방적인 통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스케줄 변경에 미동의하는 것뿐이었다. 스케줄 변경에 동의하지 않으면 예약 취소와 새 항공편 티켓팅은 오로지 소비자의 몫이다. 항공사에서는 변경 전 노선 항공권을 취소하라며, 취소하지 않아 생긴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통보만 해왔다.
여행자보험은 이미 가입을 한 뒤였으나 여행일 개시 전에 생긴 일정 변경과 그에 따른 손해는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처음 항공권을 예약할 때 도움을 주었던 트래블월렛 측에서 다시 한번 도움을 주어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원래 우리는 티웨이항공과 제주항공, 두 편에 나누어 탑승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티웨이항공을 취소하는 바람에 16명의 탑승권을 새로 구해야 했다. 기존 제주항공의 남은 좌석을 예약하고, 부족한 좌석은 다른 항공편을 구했다. 다행히 아시아나 항공에 비슷한 가격대, 비슷한 시간의 좌석이 남이 있어서 8명은 아시아나를 타고 가게 되었다.
8월 말, 2학기 개강을 하고 딱 한 주 뒤가 우리의 졸업여행이었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여행일정과 준비물을 점검했다. 여전히 일부 학생들은 트래블월렛 카드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다시 한번 주지 시켜야 했고, 심지어 몇몇은 그 사이에 어플이 사라져 있었다. 어플을 다시 설치하고 인증을 하고, 홍콩 달러를 충전하고, 홍콩 공항 ATM에서 출금하는 방법과 트리플 어플에 가계부를 작성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발달장애 아이들이 단번에 이해하긴 어려운 과정이지만 어차피 여행 가서 여러 번 반복할 과정이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마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말을 보냈다. 갑자기 여권을 못 찾겠다는 학생 덕분에 '긴급여권'을 폭풍검색하기도 하고, 하필 이 시점에 휴대폰 액정을 깨뜨리는 바람에 휴대폰을 바꾸고 여행어플을 새로 확인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도 있었으나 어쨌든. 우리는 예정대로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외 자유여행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이동하는 날이다. 다른 나라로, 다른 도시로, 숙소로 이동하는 날.
1학기 내내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닥치면 긴장되고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첫 번째 고비는 입국신고서 작성하기. 영어로, 그것도 칸에 맞추어 작은 글씨로 입국신고서를 채워 넣는 건 우리 아이들에게 상당히 어려운 미션이다.
지난해 오사카도 그랬고, 요즘은 온라인으로 미리 신고서를 작성하고 입국할 땐 QR만 제시하면 되는 국가도 많은데 홍콩은 아직까지 수기로 작성을 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처럼 중간에 마카오를 왔다 갔다 하는 경우에는, 입국신고서만 두 번 작성해야 했다. 한국에서 홍콩으로 들어갈 때 한 번,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돌아올 때 또 한 번.
준비할 때부터 고난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입국신고서 작성은 여러 번 연습을 했다.
가장 먼저 여권에서 자신의 이름, 성, 여권번호, 발급일, 만료일, 생년월일, 국가 등의 정보를 찾아 쓰는 연습을 했다. 다른 정보는 그럭저럭 쉽게 찾아서 쓸 수 있었는데, 날짜를 쓰는 건 혼돈의 카오스였다. 평소 익숙한 연도-월-일 순서가 아닌 일-월-연도의 순서로 써야 했고, 한 자리 숫자 앞에는 0을 넣어야 했으며, 신여권이 아닌 구여권에는 월이 숫자 없이 알파벳 세 자리로만 표기되어 있는 등 일련의 모든 과정이 우리 아이들에겐 커다란 난관이었다.
여권에서 해당 정보를 찾는 연습을 한 후에는 홍콩 입국신고서 양식에 맞추어 작성하는 방법을 연습했다.
입국신고서에는 여권정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들어가야 했다. 출생지와 체류지 주소, 집 주소, 항공편, 출발지 등.
그중 최고는 단연 집 주소였다. 한국 주소는 영문으로 바꾸는 순간 지나치게 길고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 학교의 주소인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군로 18'은 '18, Cheonggun-ro, Cheongpyeong-myeon, Gapyeong-gun, Gyeonggi-do'라고 쓴다. 알파벳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영어를 어느 정도 아는 아이들에게도 주소 쓰기는 험난했다. 심지어 입국신고서의 작은 칸 안에 맞춰 써야 했으니 아이들이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행을 가려면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아이들은 되든 안 되는 열심히 입국신고서를 그렸다. 잘못 쓴 건 수정해 주고, 다시 반듯하게 베껴 쓰고, 완성된 신고서를 사진 찍었다. 그리고 각자 휴대폰 갤러리에서 신고서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는 연습을 이후로도 몇 차례 더 했다.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이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승무원이 입국신고서를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 코를 박고 입국신고서를 베껴 썼다. 야무지게 연습했던 입국신고서 종이를 챙겨 와 베끼는 아이도 있었다.
홍콩까지 비행시간은 충분히 길었고, 비행기 안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아이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스스로 자신의 신고서를 작성했다. 완성이 어려운 몇몇 아이들도 주소 등 작성이 어려운 부분을 제외하고, 스스로 쓸 수 있는 내용은 최대한 작성하게 했다.
여행 프로젝트 수업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히 된다는 것이다. 어려우면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던 발달장애 아이들이, 되든 안 되든 도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 그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여행이 가진 힘이다.
그렇게 입국신고서 작성을 무사히 통과하는 듯했으나.
출국 직전 바뀐 항공편이 결국 화근이 되었다. 기존 티웨이 항공에서 새로 바뀐 항공편으로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한번 연습하고 왔건만 깜빡하고 이전 항공편으로 작성한 아이가 있었다.
교사들이 알아챘을 땐 비행기 안에서 작성할 만한 여유가 없어서 입국심사 전 새로 작성하기로 했다.
나머지 아이들을 인솔해 먼저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수하물을 찾고, 트래블월렛 카드로 ATM 기기에서 소액의 현금을 인출하고 있을 때. 후발대에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K의 짐이 없어요...! 대신 J의 캐리어가 여기 남아있는데 혹시 바뀐 게 아닌지 확인해 주세요."
돈을 찾다 말고 재빨리 캐리어를 확인했다.
J가 가져온 캐리어에는 J의 이름도, K의 이름도 아닌 전혀 다른 제3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맙소사. 큰일이었다. 캐리어의 이름을 더 철저히 확인했어야 하는데. 자책감이 스쳤다.
핑계를 찾자면,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르르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꽤 긴 시간을 지체했고, 우리와 같은 항공편에서 내린 사람들이 대부분 입국심사장으로 떠난 이후 막바지로 입국심사를 통과했으며, 수하물을 찾으러 갔을 때는 거의 우리 일행의 짐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짐이 별로 없으니 짐을 찾는 것만 생각했지 찾은 짐이 자신의 것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천만다행히도 후발대가 안에서 짐이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났고, 바뀐 캐리어의 주인임을 확인한 후 백배사죄와 함께 캐리어를 돌려주었다. 남의 짐을 잘못 들고 온 J의 캐리어는 수하물 벨트에 돌고 있어서 후발대가 확보하였고, 문제는 온데간데없는 K의 캐리어였다. 누군가 바꿔 들고 간 것이라면 남아있는 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었으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닥쳐온 돌발퀘스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멘탈을 다잡았다.
발달장애 학생들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예기치 못한 상황을 수없이 겪으며 늘어난 건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어떤 문제이든, 수습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내가 당황해하면 아이들은 불안해진다. 내가 불평을 하면, 아이들은 이 상황을 더욱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아주 운이 없기만 한 건 아니었다. K의 캐리어가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J의 캐리어가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공항을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뒤늦게 알아챘더라면 더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K의 캐리어를 당장 찾지 못한다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여권, 지갑, 개인상비약 등 중요한 물품은 전부 소지하도록 했고, 캐리어에는 옷가지와 세면도구 정도만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룹별로 흩어져 공항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사이, 캐리어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수하물 분실신고를 하고 공항 직원과 이쪽저쪽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누군가가 다시 짐을 갖다 놓았는지 원래 짐 찾는 곳에 돌아와 있었단다. 모든 짐이 제 주인에게 돌아오며 돌발퀘스트는 무사히 클리어.
첫 번째 오사카 자유여행이 튜토리얼 수준의 난이도였다면, 두 번째 홍콩 자유여행은 메인퀘스트 이외의 돌발퀘스트가 속속 등장해서 하루하루가 스릴이 넘쳤다.
파란만장한 홍콩 여행기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