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다
나는 패키지보다 자유여행을 선호하지만, 자유여행이 꼭 패키지보다 나은 건 아니다. 준비과정이든 여행당일이든, 시간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패키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여행을 계획하고 예약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고, 여행 중에도 전문가의 인솔에 따라 지체되는 시간 없이 최적의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곳을 둘러보기에 적합하다. 낯선 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나 실수에 대한 부담도 현저히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선택한다는 것이 주는 만족감이 다른 모든 단점을 상쇄시킬 만큼 크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모든 인간이 삶에서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이다. 자율성이 보장될 때 수행과 성취는 높아진다. 반대로 자율성이 훼손되면 내적동기가 감소하고 행복감이 낮아진다.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대체로 자율성이 부족하다. 자라면서 겪은 크고 작은 선택들 속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경험이 적고, 실패의 경험이 늘어날수록 점점 선택의 기회조차 줄어든다.
그렇게 스무 해 이상을 살다가 우리 학교에 온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감이 없고,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성향이 높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들이 자신이 실제로 가진 능력보다도 더 낮은 성취를 보이게 만들고, 장애로 인한 어려움 외에 이차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여행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며, 스스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 과정은 즐겁고 편하지만은 않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 준비는 나 혼자 전부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4박 5일의 홍콩 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나는 유럽여행을 계획할 때보다 더 많은 자료조사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업무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시작한 일이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이 졸업여행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홍콩으로 여행지를 결정한 후 우리는 홍콩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가고 싶은 관광지를 찾았다.
정보는 너무 없어도 찾기가 어렵지만 너무 방대해도 고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무작정 인터넷 검색을 하기보다는 여행정보가 잘 정리된 어플을 활용하기로 했다.
지난해 오사카 여행 때 활용했던 트리플 어플이 나쁘지 않았기에 올해도 도움을 받았다.
어플에 정리된 관광지 목록 중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를 선택하고, 간략한 여행지 정보와 이유를 쓰도록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활동지를 보니 절반가량의 선택지가 비슷했다. 1번 디즈니랜드, 2번 스타의 거리, 3번 리펄스베이. 딱 보니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였다.
맙소사. 도통 주관이 없고 자기표현을 하지 않아 수업을 힘들게 했던 녀석들의 1학년 때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그때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고 뭐라도 채웠으니 발전했다고 해야 할지… 여행일까지 여유가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사고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활동지를 모두 새로 나누어주었다.
교사의 기대만큼 학생들이 따라주지 않을 때에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을 해야 한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음에도 관광지를 아무렇게나 선택한 건 아무래도 낯선 여행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인 듯했다.
트리플은 정보가 알아보기 편하게 정리되어 있어 유용했으나 짧은 설명과 사진만으로 우리 아이들이 관광정보를 이해하기에는 제한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홍콩의 유명 관광지 영상을 몇 개 찾아 함께 시청했다. 영상과 설명이 더해지자 확실히 아이들이 정보를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관광지가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환호성이 나왔다. 방청객 아르바이트보다 더 열정적인 반응이었다.
유일하게 부정적인 반응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트래킹 코스였다.
“트래킹은 싫어요!”
“그래? 나는 좋은데. 그럼 가고 싶은 데를 열심히 찾아봐. 이번에도 일이삼 번을 그대로 쓰면 내가 원하는 대로 트래킹 코스를 일정에 넣을 거야. “
농담반, 진담반으로 선언하자 아이들은 격렬한 거부와 함께 다급히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관광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국적인 풍경이 걸음마다 눈에 박히는 트래킹의 묘미를 설파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나 꾹 참았다. 옳고 그름이 아닌 선호의 문제를 나의 판단이 더 우월하다며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교사의 말은 학생들의 의견보다 힘이 세다. 힘센 자의 목소리가 크면 약자들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다 종내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자율성은 없어지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을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나 학생주도적인 프로젝트 수업에서는 더더욱 나의 선호보다 학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영상의 힘인지 트래킹의 힘인지 다시 선택한 관광지는 처음보다 훨씬 다양했다. 피크트램, 란콰이펑,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 마카오타워, 익청맨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트 등 여러 장소가 제각각의 이유로 나왔다.
인원이 많다 보니 모두 발표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지만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친구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서른 곳이 넘는 관광지 목록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원하는 모든 곳을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유란 무제한적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황에 맞추어 욕구를 조절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보다 많은 아이들이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각 관광지마다 가고 싶어 하는 인원을 조사했다. 디즈니랜드처럼 만장일치나 과반수 이상이 원하는 곳은 일정에 넣고 어중간한 곳은 보류했다.
보류한 곳은 동선에 따라 넣고 빼기도 하고, 일부는 그룹을 나누어 가기로 했다.
이동경로와 방법을 고려하여 4박 5일의 일정을 계획하는 데에도 트리플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수업은 대략 2-3주가 걸린 내용이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선택한 여행지를 모두 찾아서 트리플에 입력한다. 일정에 추가하면 자동으로 구글지도가 연동된다.
그럼 지도를 확대해 가까운 거리에 모인 일정끼리 묶는다. 그리고 각 관광지를 클릭하면 나오는 기본정보를 찾아 꼭 가야 하는 날이나 피해야 할 날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기껏 찾아갔더니 휴무일이라든지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다 함께 논의하여 전체 일정을 정한다.
고심 끝에 정한 일정은 이후에 새로운 정보를 찾으며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야 했다.
어쩌면 여행지에서도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의 목표는 완벽한 여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부딪히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며 대안을 찾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값진 배움이기에 우리의 삶에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다.